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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힘

by 김민식pd 2018. 9. 3.

평생을 통틀어 가장 열심히 공부한 시기는 외대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이었어요. 그때는 하루 15시간씩 공부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잠들기 전까지 쉬지 않고 영어 공부만 했으니까요. 이코노미스트지를 읽고 영문 에세이를 쓰고 CNN을 청취하고 영어 연설원고를 만들었어요. 동시통역 수업에 들어가면 2시간 내내 초집중 상태입니다. 연사는 쉼없이 영어로 계속 연설을 합니다. 귀로는 듣고요, 머리로는 해석을 하고요, 입으로는 우리 말로 끊기지 않고 통역을 합니다. 이런 공부를 하루 종일, 매일 매일 하다보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폐해지고요. 동기 중에는 몸이 아파 휴학하거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자퇴하는 친구도 꽤 많았어요. 동기들이 모이면 그런 얘기를 했어요. "결국 공부도 체력이 받혀 줘야 하는구나."

드라마 연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오래 하기 위해서는 건강이 받혀줘야 한다고 믿어요. 건강을 생각해서 술 담배 커피를 멀리합니다. 물론 이게 쉽지는 않지요. 특히 일이 많을수록 그래요. 잠깐 짬이 나면 담배를 피우고, 일이 일찍 끝난 날은 팀원들과 술을 마시고, 야근 할 때는 커피가 잠을 깨워주지요. 사무직 노동 10년이면 건강이 많이 망가집니다. 

출판사에서 13년을 에디터로 일한 분이 있어요. 책상앞에 쪼그리고 앉아 일만하다보니 나이 마흔에 남은 건 고혈압과 스트레스, 저질 체력 뿐입니다. 어느날, 운동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동네 수영장을 다닙니다. 공터를 뛰기 시작하고, 바구니 자전거로 슈퍼를 다니기 시작해요. 마흔에 운동을 시작하여, 철인 3종 경기 (바다 수영 3.8킬로, 사이클 180킬로, 마라톤 42.195킬로)를 완주하는 강철 체력의 소유자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 과정을 쓴 책이 <마녀체력> (이영미 / 남해의 봄날)이에요.

운동을 시작한 계기가 있어요. 이분과 같이 사는 남편이 초등학교 다니는 아들의 운동회에 나가 달리기에 참여했다가 넘어집니다. 20대 시절 생각하고 뛰지만, 운동을 하지 않는 30대 남자의 몸은 금세 망가지거든요. 배도 나오고, 조금만 뛰어도 헉헉 거리고 넘어져요. 그날의 쇼크 이후, 남편은 대학 이후 줄기차게 피워온 담배를 끊습니다. 동네 마라톤 클럽에 가입해 뛰기 시작해요. 운동회에서의 굴욕이 남편에게는 아이언맨(철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계기가 되지요. 

"삶의 차이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일어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라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상반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늘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남편은 운동회 때 당한 망신살을 새로운 삶의 기회로 반전시켰다. 까짓 몇 번 넘어졌어도, 바지에 묻은 먼지 털듯이 툭툭 잊어버리면 그만 아닌가. 담배를 줄기차게 피워대면서 뱃살 출렁이는 중년 남자로 나이 들어간다 해도 나무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 일을 기점으로 남편은 자기 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급기야 동네 마라톤 클럽에도 가입했다. 그렇게 체력을 단련하는 시간을 조금씩 늘려 나갔다. 

(위의 책 24쪽)


맞아요. 내게 일어나는 일이 나의 인생은 아니에요. 그 일에 대한 나의 반응이 나의 인생이지요. 남편을 보며 운동을 시작한 저자가 트라이애슬론 경기 15회, 마라톤 풀코스 10회, 미시령을 자전거로 오르내리는 강철 체력을 갖춘 사람으로 변모해갑니다. 그렇게 갈고닦은 체력을 바탕으로 인생 후반전에 새로운 직업을 열어가는 과정이 감동이에요.


책의 서두에 이런 말이 나와요.


영웅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은 그걸 하지 않는다.

-로맹 롤랑


이 책은 진짜 영웅담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을 계속하며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이야기거든요. 저는 이번 가을, 자전거를 타고 전국일주를 떠납니다. 나이 50에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해요. 내년에 나올 여행 책의 에필로그를 장식하고 싶은 저만의 모험담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싸이클 전국일주를 완주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나이 스물에 전국일주를 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이 50에도, 60에도 꾸준히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고, 언젠가 나이 70에 자전거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겁은 나지만 도전하려고 합니다.


'용기'란 두려움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두려움보다 더 중요하다는 판단이다. 더 중요한 우선순위가 생기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위의 책 95쪽)


운동, 힘들지요. 하지만 저는 제 인생이 소중하기에, 괴롭고 힘들어도 운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주말마다 팔당댐까지 자전거를 달리며 체력을 만들고 있어요. 자전거를 끌고 나갈 때마다 설렘과 가벼운 흥분이 나를 감쌉니다. 

체력은 국력이라고 하는데요. 체력은 힘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도록 해주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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