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의 제목은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에 나오는 ‘버려지는 노력은 없다’에서 따왔습니다.)


2012년 MBC 노조가 170일 파업을 끝내고 업무 복귀를 결정했을 때 김재철 사장과 그 일당은 무척 당황했어요. 전투력이 충만한 조합원들이 투쟁에서 복귀하는데,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파업에서 패배하고 여러 명의 해고자를 남겨두고 돌아오는 조합원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교육명령을 내립니다. 잠실 신천에 위치하고 있어 훗날 ‘신천교육대’(전두환 정권의 삼청교육대에 대한 패러디)로 알려진 MBC 아카데미에 사람들을 보냅니다. 김세용, 최일구 앵커를 비롯하여 강재형 아나운서, 김재영 피디 등 100여명이 이곳에 발령 나지요. 저의 경우, 징계 3종 세트를 받았는데요. 대기발령이 끝나면, 6개월 정직을 시키고, 정직이 끝나면 다시 교육발령을 내며 끈질기게 복귀를 막았어요.


신천교육대에서는 초반에 교육 과정을 짜는데 골치를 썩습니다. 브런치 교육 등이 기사화되면서 언론인의 아우슈비츠라고 지탄을 받기도 했어요. 교육 담당자들은 고심 끝에 문화계 인사를 강사로 모시기 시작합니다. 그 중 한 분이 이준익 감독님이었어요. MBC 파업 집회에 오셔서 지지 발언까지 하셨던 감독님을 다시 뵙게 되니 반가웠어요. 이준익 감독은 한자리에 올망졸망 앉아있는 기자와 피디 아나운서들을 보고 그러셨어요. “기왕에 이렇게 만났으니 재미나게 이야기나 나누시죠.”


당시 이준익 감독님이 해주신 강의는 최고의 영상 콘텐츠 기획 강의였어요. 오전에는 감독님의 영화를 보고, 오후에는 그 영화 제작에 얽힌 뒷이야기를 들었지요. 드라마 피디인 저는 좋았지만, 함께 강의를 듣던 기자나 교양 피디들은 자괴감을 느꼈을 수도 있어요.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디인가?’


2013년 당시 이준익 감독님은 새롭게 준비 중인 영화 이야기도 하셨어요. 설경구 엄지원 주연의 ‘소원’. 아동 성폭행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정의를 고민한다는 점에서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이야기라고 말씀하셨어요. 영화 개봉 후 한 인터뷰에서 이준익 감독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성폭행 사건 등을 접할 때면 누구나 정의감에 불타 한소리씩 하잖아요. 그러면서 자신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져요. 이후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회피해요. 쳐다보지 않는 게 도움을 주는 거라 생각하죠. 그렇게 되면 피해자들은 절벽으로 갈 수 밖에 없어요. 그들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응원해줘야죠. 그들의 입장에서도 최고의 복수는 ’별 일없이 사는 것‘ 아닐까요?’


시간은 흘러 어느덧 2018년 1월, 저는 7년만에 연출 복귀를 하게 되었어요. 드라마 부장 한 분이 제게 보내준 메일에서 소재원이라는 작가의 이름을 봅니다. 영화 ‘소원’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라고.


고난을 겪은 사람에게 최고의 복수는 잘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드라마 PD로 한창 일할 시간을 빼앗아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기엔 내 인생이 너무 소중하거든요. 나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기에 하루하루 즐겁게 사는 데 최선을 다해요. 신천교육대에서 지내는 동안에도 매일 열심히 수업을 들었어요. 기왕에 회사에서 교육발령을 냈다면, 나는 이곳에서 무엇 하나라도 배워야겠다.


<이별이 떠났다>를 보면, 남편의 배신 이후, 영희는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고 피폐한 삶을 삽니다. 영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잘 사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습니다. 소설 <이별이 떠났다>는 이별을 끌어안고 사는 여자, 영희가 정효를 만나 이별을 떠나보내는 이야기인데요. 지난 1월, 원작 소설을 읽으며 2013년 신천교육대에서 본 이준익 감독의 표정을 떠올렸어요. 좋은 이야기를 만난 감독이 흥분에 들떠있는 모습. 


이준익 감독 같은 우리 시대의 최고의 이야기꾼을 매료시킨 작가라고 하니, 문득 저도 기대에 들뜨게 되었어요. 이 작가가 그려내는 드라마라면 연출해보고 싶다고. 그래서 연출을 자원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2013년 신천교육대에서 보낸 시간이 지금 <이별이 떠났다>를 연출하는 현재와도 연결되어 있네요. 역시 인생에서 버려지는 시간은 없어요. 지면을 빌어 이준익 감독님께도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감독님 덕분에 소재원이라는 이야기꾼을 만났어요. 고맙습니다! (더불어 새 영화 ‘변산’도 응원합니당! ^^)


소재원 작가가 그려나가는 <이별이 떠났다>, 매주 토요일 저녁 8시 45분에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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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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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18.07.06 07:3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이준익감독, 소재원 작가와 이런 인연이 있으셨군요.
    소재원 작가는 이번 드라마때문에 처음 알게 되었는데...
    처음엔 누구지 했는데 알고보니 영화화된 소설을 여러편 쓴 작가여서 놀랬죠. ^^

    정말 버려지는 시간은 없는거 같아요. 오늘 글을 읽으면서 잡스형님 말씀이 다시 떠올랐어요.

    'Connecting the dots'

    하루하루 즐겁게 촬영 하시는 피디님을 응원하며.
    이번주 방송도 본방사수~~~
    믿보연 김민식 피디님 파이팅!!!

    #이별이_떠났다
    #매주_토_20:45
    #본방사수
    #안되면_다시보기_몰아보기

  2. 아리아리짱 2018.07.06 07:5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pd님 아리아리!
    정말 좋아하는 이준익감독님과 연결고리가 이렇게 되는군요.
    '버려지는 시간은 없다.'
    주어진 모든시간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기쁨의
    시간으로 만들어 나가는 힘이 행복의 원동력인듯 합니다.
    내일 드라마 또 설레고 기다려집니다.

  3. 안가리마 2018.07.06 09: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인생은 시간으로 이루어져있고
    소중하지 않은 시간이 없다라는 흔한 말들도
    사실 쉬 망각하며 삽니다.
    미워하며 살기엔 내 인생이 너무나 소중하다는 말씀
    마음에 새기며
    열심히 살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4. 꿈트리숲 2018.07.07 13:4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사장은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라고 교육을 가장한 유배를 보냈는데, 피디님은 그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당당히 다시 입성하셨네요.

    그들에게 있어 크로노스의 시간이
    피디님에게는 한순간도 헛되지 않은
    카이로스의 시간이었나 봅니다.

    오늘 쏘아올린 화살이 언제 어떤 과녁에 맞을지 알 수 없으니 대충 쏘지 말고 온맘을 다해 있는 힘껏 쏴야겠어요.
    생각할 꺼리를 많이 던져주는 오늘
    글도 감사합니다. 무더위에 건강하게
    드라마 촬영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꿈트리숲=정지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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