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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희의 두번째 걸음

by 김민식pd 2018. 6. 1.

2015년 가을, 인사발령으로 드라마국에서 쫓겨났을 때, 너무 괴로웠어요. 사랑하는 회사로부터 배신을 당한 것 같았죠. 남은 평생, 좋아하는 드라마 연출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힘든 건 나 자신을 향한 자책이었어요. '내가 유명한 피디였다면 회사에서 이렇게 할 수 있었을까?' '내가 평소 윗사람들에게 잘 했다면 상황이 달랐을까?' '그때 노동조합 집행부를 한 게 잘못이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은 나를 더 힘들게 했지요. 무엇보다 힘든 건 사람들과의 만남이었어요. 작가도, 배우도, 친구도 만날 수가 없었어요. '다음 작품 언제 하세요?' '좋은 대본 있는데 혹시 MBC에서 편성이 가능할까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니?' 그런 일상적인 질문들이 저를 힘들게 했어요. 결국 저는 집안에 틀어박혀 살기로 마음을 먹어요. 카톡 상태창에 글을 띄우고 칩거 모드에 들어가지요.


TV도 보지 않고, 드라마 대본도 읽지 않고 살아요. 대본을 읽으면 뭐합니까. 좋은 대본이 있어도 나는 연출할 수가 없는데. 재미난 드라마를 보면 약이 오르고, 재미없는 드라마를 보면 화가 나요. '저럴 거면 나를 연출시키지...' '나는 정말 연출을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연출할 피디가 없다고 난리치면서도 회사에서 찾지 않는 걸 보면...' 그렇게 자괴감과 자책감에 빠져 몇년을 살았어요. 


드라마국에 복귀한 올 1월, 주말특별기획 담당 CP인 김승모 부장이 메일을 보내왔어요. "드라마국 복귀를 축하합니다. 혹시 관심을 가질만한 대본이 있어 보내드립니다." 김승모 부장은 제게 <이별이 떠났다>라는 웹소설 원작 드라마의 연출을 권했는데요. 처음엔 겁이 덜컥 났어요. 지난 몇년 드라마와 담을 쌓고 산 내가 다시 연출을 할 수 있을까? 찬찬히 대본을 읽는 도중, 주인공 영희의 사연이 시선을 사로잡았어요. 

남편과 젊은 여자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다는 이야기에 영희는 절망합니다. 평생 현모양처로 살며 남편과 아들 뒷바라지를 하며 살아온 자신의 삶을 부정당한 것 같아요. 자신을 향한 자책도 이어졌을 거예요. '내가 젊고 예뻤다면 남편이 바람이 났을까?' '내가 남편에게 평소에 살갑게 했다면 바람이 안 났을까?' '내가 아들과 사이가 좋았다면 아들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은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이걸 끊임없이 고민하는 삶은 사람을 지옥으로 밀어넣거든요. 웃으며 인사하는 이웃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힘들어요. '잘 지내시지요?' '남편분이 요즘 안 보이시네요?' '어제 그 뉴스 보셨어요? 연예인 누가 스캔들이 났대요, 글쎄.' 이런 일상적인 대화에도 끼어들 수 없거든요. 무엇보다 괴로운 건, 남편에게 버림받았다는 자책이 자신감 부족으로 이어진다는 거죠. 거울도 볼 수 없어요. 거울을 보면, 남편에게 버림받은 늙고 추한 여자가 보일 까봐요. 


드라마 <이별이 떠났다>는 그런 영희가 정효를 만나,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올 1월 드라마국 복귀 인사명령이 났을 때 마음 한 편으로는 두려웠어요. 내가 과연 드라마 연출을 잘 할 수 있을까? 앞으로 나는, 욕먹지 않는 드라마를 만들어야 하고, 스태프들의 노동 환경 개선도 고민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회사의 경쟁력에 기여해야 하는데 이 많은 조건을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이별이 떠났다> 대본을 읽으면서, 주인공 영희에게 자꾸 말을 걸게 되더군요.

"남편의 바람, 그거 당신 잘못 아니잖아요. 당신 잘못이 아닌데, 왜 당신이 벌을 받으면서 살아요? 이웃 사람들의 뒷말, 그거 당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당신이 어찌 할 수 없는 일을 가지고 왜 힘들어해요? 그냥 지금 이 순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봐요."


영희에게 말을 걸듯, 겁먹고 주저하는 저 자신을 조금씩 조금씩 달래가며 문밖으로 걸어가고 있어요. 

<이별이 떠났다> 

내일 저녁 (매주 토요일) 8시 45분. 

세상을 향한 두번째 발걸음을 뗍니다.


8년만의 연출복귀, 

부족한 점도 많지만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신발끈 묶고 길을 나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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