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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의지는 일상으로 증명한다

by 김민식pd 2018. 11. 1.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한번 시도해봅니다. 10년 전, 예능 피디로 코미디를 만들던 제가 드라마국으로 옮겼을 때도 그런 생각이었어요. '드라마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다만 저의 그런 도전이 못마땅한 사람도 있어요. 평소 제가 존경하던 드라마 선배는 제게 이렇게 물었어요.

"너는 무엇이 만만한 거냐? 내가 만만한 거냐, 내가 하는 일이 만만한 거냐?"

드라마의 방향을 놓고 다투던 후배는 이렇게 말했어요.

"형이 드라마를 알아요?"


저는 일을 놀이처럼 접근합니다. 그냥 편하게 한번 들이대보는 마음으로 도전하는데 그래서 반감을 살 때가 있지요. 독서를 놀이로 생각하는 저는 문학평론가의 글을 즐겨 읽지는 않습니다. 책은 제게 즐거움의 대상인데, 그걸 너무 심각하게 분석하고 평해놓은 걸 보면 좀 거부감이 생겨요. '너, 이런 문학 이론 알아? 라캉 알아? 지젝 알아?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책을 읽는다고 그래?' 이렇게 훈계하는 것 같아 책을 조용히 덮을 때가 있습니다. 이론을 알아야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제가 요즘 어느 문학평론가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있어요. 

<마음을 건다> (정홍수 / 창비)

이 분의 글을 읽다보면, 모르던 사실을 고시랑고시랑 수다 떨듯 알려주셔서 좋아요. 아, 문학평론이라고 다 고루하고 지루한 건 아니구나, 하고 새삼 느끼고 있답니다.

그 책에서 이런 글을 만났어요.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1985)에서 아이를 납치해 살해한 끔찍한 가해자가 이미 신에게서 용서를 얻은 평온한 얼굴로 피해자 어머니를 대하는 대목은 지금 돌이켜도 섬뜩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소설에서 펼쳐진 기막힌 상황이 더 전율스럽고 견딜 수 없게 느껴진 것은, 작품이 발표된 1985년 당시 한국의 정치 현실이 이 소설의 숨은 맥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전두환의 집권기였다. '땡전 뉴스'의 시절이기도 했지만, 권력을 장악한 학살 주역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죄의식과 가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너무도 당당했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숨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시절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용서를 얻었던 것일까. 아니, 용서를 구하기라도 했을까. 사법적 단죄는 1996년에야 뒤늦게 이루어졌지만 학살 주역들의 입에서 진실된 참회의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나는 접한 적이 없다. 어쩌면 그들에게 사람살이의 도리는 다른 차원의 세상과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얼굴을 들고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게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정말 수상하다. 

(위의 책 81쪽)

영화 <밀양>을 인상깊게 봤었고, 그 영화의 원작이 이청준의 소설이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정작 소설을 읽을 생각은 못했어요. 스포일러를 싫어해서, 이미 영화로 이야기를 알게되었으니 굳이 소설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한번도 그 이야기가 80년 광주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정홍수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니 문득 '벌레 이야기'가 읽고 싶어지네요. 


'너따위가 어찌 감히 드라마 연출을 한다고 그래?'라는 선배를 보며 생각했어요. 

'겨우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만드는 드라마도 있지 않을까?'

'형이 드라마를 알아?'라고 하는 후배를 보며 생각했어요.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마음 아닐까?'

결국 나에게 상처를 주는 누군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후의 삶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으로 나의 의지,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책을 좋아합니다. 문학을 알거나, 세상을 알아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문학에 대해 알고 싶고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래요.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는 재미가 있거든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 남은 평생 일상으로 증명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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