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한번 시도해봅니다. 10년 전, 예능 피디로 코미디를 만들던 제가 드라마국으로 옮겼을 때도 그런 생각이었어요. '드라마를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 다만 저의 그런 도전이 못마땅한 사람도 있어요. 평소 제가 존경하던 드라마 선배는 제게 이렇게 물었어요.

"너는 무엇이 만만한 거냐? 내가 만만한 거냐, 내가 하는 일이 만만한 거냐?"

드라마의 방향을 놓고 다투던 후배는 이렇게 말했어요.

"형이 드라마를 알아요?"


저는 일을 놀이처럼 접근합니다. 그냥 편하게 한번 들이대보는 마음으로 도전하는데 그래서 반감을 살 때가 있지요. 독서를 놀이로 생각하는 저는 문학평론가의 글을 즐겨 읽지는 않습니다. 책은 제게 즐거움의 대상인데, 그걸 너무 심각하게 분석하고 평해놓은 걸 보면 좀 거부감이 생겨요. '너, 이런 문학 이론 알아? 라캉 알아? 지젝 알아? 그것도 모르면서 무슨 책을 읽는다고 그래?' 이렇게 훈계하는 것 같아 책을 조용히 덮을 때가 있습니다. 이론을 알아야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그런 제가 요즘 어느 문학평론가의 책을 열심히 읽고 있어요. 

<마음을 건다> (정홍수 / 창비)

이 분의 글을 읽다보면, 모르던 사실을 고시랑고시랑 수다 떨듯 알려주셔서 좋아요. 아, 문학평론이라고 다 고루하고 지루한 건 아니구나, 하고 새삼 느끼고 있답니다.

그 책에서 이런 글을 만났어요.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1985)에서 아이를 납치해 살해한 끔찍한 가해자가 이미 신에게서 용서를 얻은 평온한 얼굴로 피해자 어머니를 대하는 대목은 지금 돌이켜도 섬뜩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소설에서 펼쳐진 기막힌 상황이 더 전율스럽고 견딜 수 없게 느껴진 것은, 작품이 발표된 1985년 당시 한국의 정치 현실이 이 소설의 숨은 맥락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전두환의 집권기였다. '땡전 뉴스'의 시절이기도 했지만, 권력을 장악한 학살 주역들의 얼굴 어디에서도 죄의식과 가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너무도 당당했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피해자라는 사실을 숨겨야만 살아갈 수 있는 시절이었다. 도대체 그들은 언제 누구로부터 용서를 얻었던 것일까. 아니, 용서를 구하기라도 했을까. 사법적 단죄는 1996년에야 뒤늦게 이루어졌지만 학살 주역들의 입에서 진실된 참회의 말이 나왔다는 이야기를 나는 접한 적이 없다. 어쩌면 그들에게 사람살이의 도리는 다른 차원의 세상과 언어를 구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얼굴을 들고 나와도 이상하지 않겠다 싶게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정말 수상하다. 

(위의 책 81쪽)

영화 <밀양>을 인상깊게 봤었고, 그 영화의 원작이 이청준의 소설이라는 얘기도 들었지만, 정작 소설을 읽을 생각은 못했어요. 스포일러를 싫어해서, 이미 영화로 이야기를 알게되었으니 굳이 소설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한번도 그 이야기가 80년 광주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정홍수 선생님의 책을 읽고 나니 문득 '벌레 이야기'가 읽고 싶어지네요. 


'너따위가 어찌 감히 드라마 연출을 한다고 그래?'라는 선배를 보며 생각했어요. 

'겨우 나 정도 되는 사람이 만드는 드라마도 있지 않을까?'

'형이 드라마를 알아?'라고 하는 후배를 보며 생각했어요.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마음 아닐까?'

결국 나에게 상처를 주는 누군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이후의 삶으로, 하루하루의 일상으로 나의 의지,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책을 좋아합니다. 문학을 알거나, 세상을 알아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 문학에 대해 알고 싶고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래요.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는 재미가 있거든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 남은 평생 일상으로 증명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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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민식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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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섭섭이짱 2018.11.01 07:3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하세요.
    저도 심각하고 어려운 문확평론은
    잘 안 읽었는데요..이 책은 함 읽고 싶어지네요.

    형이 드라마를 알아? 라고 얘기한 후배는
    피디님의 마음을 이제서라도 알면 좋겠는데..
    그 후배와 선배는 잘 지내시나요? ^^
    갑자기 궁금해지네요.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는 재미...
    피디님을 좋아하는 마음....
    저도 평생 일상으로 증명하고 싶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

  2. The snowball 2018.11.01 08: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도 책을 매우 좋아합니다
    학문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지만 읽고 즐기면 충분한거 아닐까요?

    다른 일들도 조금만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도전하고 실천해봅니다
    비록 실패하고 주변에서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해도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런분들은 대부분 시작도 못하더라구요

    오늘도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항상 피디님 글 읽고 아침에 힘내봅니다.
    감사합니다~~^^

  3. 2018.11.01 09:03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4. 꿈트리숲 2018.11.01 09: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최근 봤던 책에서 인상깊게 남은 '두고보자!' 정신이 생각나네요. 두고봐 가만 안둘거야가 아니라 내가 만만해보여? 뭘 알아? 같은 말에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 정신이라고 하더라구요.
    피디님 삶이 바로 두고보자 정신의 집합인 듯 싶습니다.^^
    본인의 삶으로 증명할 수 있는 저력은 호기심이군요!
    하고 싶은 일, 알고 싶은 것이 계속 생기는 사람. 앞뒤 재지 않고 한번 툭 해보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 증명 방법을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5. 하하하 2018.11.01 10:0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김민식피디님을 제주 한라도서관 강좌에서 뵈었습니다.

    그날 말씀 끝나고 시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엄청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고작 1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더라고요.
    세 시간은 지났으리라 짐작했거든요.
    1시간이 3시간 같았어, 이런 표현은 엄청 지루한 강의에나 어울리는 말인 줄 알았는데
    너무 알차고 재미있는 이야기에도 통한다는 걸 그날 알았어요.

    지금도 그날 강단에 서 계신 피디님을 떠올리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기분좋아져요.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시면서
    일상으로 증명하는 글이
    오늘은 너도 한 번 해볼래?하고 말을 건네와서
    인사드렸습니다.

  6. 박정길 2018.11.01 10:3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피디님. 이제 막 베스트셀러의 에필로그까지 정독을 하였습니다

    남겨주신 글을 읽고 이렇게 방문해 보았어요

    저는 현재 매일 매일 영어 암송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피디님 덕분이죠.

    오늘이 38회차 인데요 매일 영어 암송전 피디님의 책을 먼저 읽고 공부를 시작하며 가볍고 무거운 맘으로 시작을 하곤 했습니다

    감사 드리구요

    그럼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한권 다 외우면요

  7. 김수정 2018.11.01 10:4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좋아하는 마음이고,
    그 좋아하는 마음으로 반복하여 습관을 만들면 잘하게 되는 것일텐데
    자신은 처음부터 다 알고 잘했던 것처럼 비판하고 타인을 낮게 보는 사람들, 어디에나 한 두명은 있는 것 같아요.
    그런이들에게 내 마음이 휘둘리지 않기를.
    책과 좋은 글들로 마음을 단단히 다져 놓아아겠어요.

  8. 보리보리 2018.11.01 16:1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 읽고 나서야 제목이 눈에 들어와 다시 읽었어요. "의지는 일상으로 증명한다" 일상을 살아내는게 행복이다~ 떠오르네요

    어제 많이 웃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
    세상을 향한 따뜻한 마음 많이 느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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