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한국 SF의 새로운 기준

by 김민식pd 2018. 8. 31.

제가 어렸을 때 TV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프로그램은 미국 드라마들이었어요. <육백만불의 사나이>나 <브이>같은 미드가 인기였지요. <육백만불의 사나이>는 신체의 일부를 로봇 팔과 로봇 다리로 바꾼 미군 소령의 이야기고, <브이>는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의 이야기였으니, 미국판 SF가 인기를 끌었지요. 주말 황금 시간대를 미국 드라마가 채우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새 미드는 심야 시간대로 밀리거나 공중파에서 사라졌어요. 한국 방송제작물의 위상과 경쟁력이 올라간 덕이지요. 30년만에 우리는 미드를 보던 나라에서 한류 드라마를 수출하는 나라가 되었어요. 한국은 자국어로 만든 콘텐츠를 전세계로 수출하는 몇 안되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짧은 시간, 한국 콘텐츠 산업의 약진이 놀랍다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SF마니아입니다. 어려서 즐겨본 미드 탓인지, 슈퍼히어로와 우주선이 나오는 헐리웃 영화를 즐겨봅니다.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가는 것이 독서 체험인데, SF의 경우 그 어딘가가 미래세계나 우주공간이 되지요. 현실로부터 더 멀리 달아난다는 점 때문에 SF를 좋아하는지도 몰라요. 통역대학원 재학 중이던 1995년에는 나우누리 온라인 동호회에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을 번역해서 올리기도 했어요. 당시에는 재미난 SF는 다 외국 작품이라 생각했거든요.


SF가 너무 좋은데, 이걸로 뭘할까를 늘 생각했지만 SF 소설을 쓴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어요. 요즘은 독자로 사는 즐거움에 만족하며 살아요. 놀라운건 한국 SF문학의 발전상이지요. '한국과학문학상'이라고 국내 신인 SF작가를 위한 등용문이 있는데요. 작년에 나온 첫번째 수상작 모음집을 재밌게 읽었어요. 올해 두번째 책이 나왔습니다. <관내 분실> (김초엽 등 / 허블) 이번 책에 실린 SF 중단편들을 보니, 한국 SF가 1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성장했다는 걸 느낄 수 있어요.


놀라운건 대상과 가작을 동시에 수상한 김초엽이라는 작가의 등장이었어요. <관내분실>이라는 작품으로 대상을 수상했는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라는 작품으로 가작에 동시 당선했어요. 김초엽 작가는포항공대에서 화학을 전공한 과학자입니다. 흔히 작가라면 문과 계열이라 생각하는데요. 독서와 글쓰기를 좋아하던 중학교 시절, 과학 논픽션 책들이 그려내는 세계에 반해 이과로 진로를 결정했대요. 대학에서는화학을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단백질 센서를 연구하면서, 한편으로는 작은 매체들에 과학적 방법론과 과학자 사회의 여러측면을 다룬 에세이와 칼럼을 기고합니. 소설만큼은 도저히 자신이 없었는데, 우연히 읽게  작법서에 용기를 얻어 시험공부 하듯 소설 쓰기를 시작했다네요. 과학자로 일하는 SF 작가다운 수상 소감을 남겼습니다.




SF를 쓰는 과정은 정말로 일종의 실험 같다. 세계를 만들고 인물들을 세우고 예측한 길을 가도록 굴려보지만 항상 어디선가 문제가 생긴다. 애초부터 가설이 틀린 건지, 내가 손이 서툴러 잘 안 되는 건지 원인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과학적이라고 생각했던 설정은 항상 어디선가 구멍이 나 있고, 얼기설기 채워 넣다 보면 어느새 예측과는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결과는 갈릴레이의 수평면처럼 매끈하지도 않다. 그럴싸한 설명을 제시해보려고 했는데, 남는 것은 또 다른 질문들뿐이다. 

그래도 최악인 건 아니다. 과학의 좋은 점 중 하나는 실패가 완전한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틀리지 않는다면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내는 일도 불가능하다.

오랜 시도 끝에, 나는 글을 쓰는 일도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실패는 그리 나쁘지 않다. 그게 과학소설이라면 더더욱.

 


(위의 책 62쪽)





인생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재미난 일을 찾아 끊임없이 시도하는 거죠. 포기하지만 않으면 언젠가는 자신만의 삶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는 점에서 항상 희망이 있어요. 소설을 읽으며, 정말 멋진 작가가 등장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사는 건 이래서 재미있어요. 하루하루 살다보면, 매일 새로운 작가를 만나고,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어요. 그렇게 나의 세계가 조금씩 넓어집니다. 특히 <관내분실> 같은 놀라운 SF 작품집을 만나면, 의식의 경계가 더욱 확장되는 느낌이에요. 


이런 멋진 SF를 읽는 독자들이 많아지면, 미래의 경계도 커질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상상하는 범위 안에서 꿈을 꾸니까요. 

반응형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짠돌이 라이프스타일  (9) 2018.09.04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할 수 있는 힘  (16) 2018.09.03
콘텐츠 제작의 위기  (2) 2018.08.30
당신도 누군가의 고민거리  (14) 2018.08.29
아님 말고의 정신  (8) 2018.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