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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

벽이 아니라 사다리이다

by 김민식pd 2018. 3. 13.

매년 3월이면, 제가 하는 일이 있어요. 아카데미 수상작들을 찾아서 봅니다. 칸느와 베를린 영화제보다, 저는 아카데미가 취향이 맞더라고요. 헐리웃이라는 상업 영화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걸작의 향연. 보석같은 영화들을 찾아내어 빛을 비추는게 아카데미라고 생각합니다. 올해 작품상, 감독상, 음악상, 미술상 4개 부문을 수상한 <셰이프 오브 워터>를 봤어요.

영화 내용은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스포일러를 워낙 싫어해서. 다만 기예르모 감독의 이야기를 하고 싶네요. <판의 미로>나 <퍼시픽 림>을 보면, 델 토로 감독은 괴수물 취향입니다. 제임스 카메론 감독은 이런 말도 했다는군요.


“자네가 절대 못할 한 가지가 있어.” “그게 뭔데요?” “사랑 이야기. 자네는 소녀도 괴물처럼 만들어버릴 능력은 있어도 진짜 인간의 러브 스토리는 만들지 못할 거야.” 이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그러니까 기예르모 델 토로가 <헬보이>(2004)를 구상하고 있던 시점에 절친한 감독 제임스 카메론과 나눈 대화라고 한다. 아마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의 델 토로는 <미믹>(1997)과 <악마의 등뼈>(2001)를 만든 감독이었다. 괴수영화를 찍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남자였지만 지극히 평범한 감정인 사랑에 대한 영화를 연출하라면, 글쎄. 제임스 카메론의 말대로 기예르모 델 토로와 사랑이란 단어는 평생 마주할 일이 없어 보였다.


(출처 원문, 씨네 21기사)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9483



아름다운 사랑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를 만든 원동력은 카메론 감독의 도발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몇 년 전, 블로그 방명록에 어느 출판사 편집자님이 글을 남겼어요. 

'피디님이 올리신 영어 공부 관련 글을 책으로 내고 싶습니다.'

신이 나서 아내에게 달려갔지요.

"위즈덤하우스가 내 책을 내준대!"

아내의 첫 반응. 

"위즈덤하우스는 되게 좋은 출판사인데?"

"그러니까! 나도 그 출판사 책들 좋아하거든. 거기서 내 책이 나온다니까?"

"이상하네. 그 출판사에서 왜 그럴까? 난 당신이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 (망연자실, 상처받은 표정으로 아내를 바라보는 나...)

"당신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야. 그냥 경력이 특이한 사람이지. 피디라는 유명세로 책을 내려나본데, 그런 태도는 삼가하는 게 좋아."


아내의 말이 제게 숙제를 안겨주었습니다. 편집자를 만나 물었지요. 

"제가요, 글을 잘 못 쓰는 편이라서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책을 많이 읽고 좋은 문장을 필사하시면 도움이 될 거예요."

그 이야기에 타고다니던 차를 아내에게 주고, 매일 전철로 출퇴근을 시작했습니다. 통근시간 3시간 동안 책을 읽고, 새벽마다 일어나 블로그에 책에서 찾은 좋은 글을 필사적으로 필사했습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를 보면서 느꼈어요. 다름을 차이로 구분하지 않고, 매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닐까. 훈남이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괴물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것, 그게 진짜 사랑이 아닐까. 

카메론 감독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그걸 자신의 한계로 인정해버리지 않고, 보란듯이 한걸음 더 나아가 괴물이 나오는 사랑 이야기를 멋지게 만들어버리는 것. 그게 <셰이프 오브 워터>를 만든 원동력이라 생각합니다. 

내 앞에 서 있는 벽은 어쩌면 사다리가 아닐까? 넘어가기만 하면 새로운 세상으로 열리는..... 그렇게 믿고, 오늘도 한걸음 한걸음 딛고 오릅니다. 언젠가 아내에게 인정받는 그날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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