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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딴따라 글쓰기 교실

쓰는 인생이 남는 인생이다

by 김민식pd 2018. 2. 26.

(오늘은 살짝 겁나는 일을 해보려고 합니다. 초고 공개요. ^^

최근에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에서 글쓰기 강연을 했는데요. 그 초고를 공유합니다. )


쓰는 인생이 남는 인생이다.


안녕하세요, MBC 김민식 PD입니다. 저는 <공짜로 즐기는 세상>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는데요. 7년째 매일 아침, 한 편씩 글을 써서 올립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인생이 힘들 때마다 글을 썼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왕따였어요. 괴로울 때마다 글을 썼어요. ‘오늘은 누가 나를 또 못생겼다고 놀렸다. 오늘은 아버지한테 몇 대 맞았다.’ 다 적어둬요. 힘들 때마다 글을 쓰다 보니 나를 힘들게 하는 글도 많더라고요. ‘너 왜 아이들에게 늘 당하고 사니. 넌 왜 그렇게 공부를 못하니.’ 남이 나를 괴롭히는 것도 힘든데, 나까지 나를 괴롭히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내가 쓴 글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비록 나는 지금 왕따지만, 언젠가는 멋진 어른이 되겠어. 아버지로부터 달아나 즐거운 삶을 살아야겠어.’ 일단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합니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중간에 모의고사를 봤는데, 반에서 22등 했어요. 그 성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못 가고 집 근처 대학에 갈 것 같았어요. 나를 놀리는 친구들과 나를 때리는 아버지로부터 달아날 방법은 무조건 서울로 대학을 가는 것이었어요. 일기에 목표를 적었어요. 학력고사 280점을 넘기고, 서울로 올라가자. 이제는 일기에 불평 대신 학습 진도를 기록합니다. 나를 괴롭힌 사람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괴롭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내가 기울이는 노력이 더 중요하더군요. 6개월간 미친 듯이 공부하고, 학력고사로 반에서 2등을 했어요. 내신은 15등급에 7등급인데, 학력고사는 반에서 2등이었어요.

서울로 대학 진학을 하면, 행복할 거라 생각했는데, 소개팅 미팅 과팅 스무 번 연속으로 차입니다. ‘난 왜 이렇게 연애가 안 될까?’ 괴로울 땐 또 글을 씁니다. ‘오늘도 소개팅에서 차였다. 왜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는 걸까? 그런 상대라면 차라리 안 엮이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 나를 바람맞힌 여자들에 대한 뒷담화를 일기에 쓰면서 그걸로 마음의 응어리를 풉니다. 일단 기분이 풀려요. 그리고 내가 쓴 글을 또 들여다봅니다. ‘, 찌질하다, 찌질해. 이러니 연애가 되나? 외모는 꽝이어도 적어도 마음씀씀이는 더 커야 하는 거 아닌가? 내면의 매력을 키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책을 읽습니다. 책에서 좋은 글귀를 만나면 또 받아서 써요. 이제는 여자를 만나 술술 말이 잘 나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단단해진 생각이 말의 바탕이 되거든요. 말을 잘 하고, 글을 잘 쓰게 되면, 저처럼 생긴 사람도 연애할 수 있습니다.

인생이 괴로울 때, 글을 쓰면 됩니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바꾸는 글쓰기의 3단계가 있어요.

첫째, 내가 겪는 지금의 괴로움에 대해 씁니다. 미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해 글을 쓰고,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세상에 대한 분노에 대해 글을 씁니다. 글을 쓰면 마음이 좀 풀립니다. 내 글 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은 천하의 악당이 되고, 나는 세상으로부터 외면 받은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 고독한 방랑자가 되고 황야를 떠도는 총잡이가 됩니다. 글을 쓴 다음에 찬찬히 글을 읽어봅니다. 글을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아픕니다. 덜 아프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합니다. 글 속에 나오는 주인공을 더 멋지게 꾸미기 위해, 즉 내가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합니다.

둘째, 내가 그리는 내일의 꿈에 대해 글을 씁니다. 변화를 꿈꿀 때 필요한 건, 최악을 각오하고, 최선을 희망한다는 자세입니다. 3 6개월간 미친 듯이 공부하면 최악은 무엇일까요? 수업 시간에 멍 때리기 못하고, 점심시간에 낮잠을 못자고, 자습 시간에 만화 못 보는 것? 최고는 무엇일까요? 나를 놀리는 친구와 나를 때리는 아버지에게서 탈출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것! 최악은 그리 나쁘지 않고, 최상은 황홀한 꿈이 됩니다. 이렇게 하나하나 쓰다보면 내가 쓴 글이 나의 장밋빛 미래가 됩니다. 내가 꿈꾸는 미래에 대해 최대한 자세하게 씁니다. 글을 쓰는 동안, 현실의 괴로움은 사라지고 머릿속에는 미래의 황홀경이 펼쳐집니다.

셋째, 내가 꿈꾸는 미래가 현실이 되기 위해 매일매일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그 결과를 다시 글로 씁니다. 올해 목표가 독서라면 매일 읽은 책에서 좋은 글귀를 필사합니다. 목표가 영어 공부라면, 그날의 학습 진도를 기록합니다. 목표가 몸매 가꾸기라면 그날의 운동량을 글로 씁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매일매일 쌓이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도 고취됩니다. 매일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해서,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내가 정한 목표를 매일 반복하고 그걸 기록으로 남기니까 멋있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인생이 괴롭지 않아 굳이 글을 쓸 일이 없다?’ 더 좋지요. 하지만 더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은 있겠지요? 인생이 더 즐거워지는 글쓰기를 소개합니다. 새해가 되면 우리는 몇 가지 결심을 합니다. 독서, 운동, 영어 공부, 등등. 이 모든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글쓰기와 병행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때, 그냥 읽지 마시고 메모를 하세요. 전철에서 책을 읽다 좋은 글귀를 만날 때마다 쪽수만 휴대폰에 메모합니다. 다음날 아침 메모를 보면서 그 페이지를 다시 펼칩니다. 이 글이 내 마음을 울린 이유가 무엇일까? 그냥 읽고 지나치면 남는 게 없는데 글을 쓰면 남습니다. 글을 쓰는 것은 책읽기보다 힘듭니다. 힘든 일을 할 때는, 그 일에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책에서 글귀를 고를 때, 이렇게 생각해봐요. 바빠서 책 한 권을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에게, 이 책에서 딱 한 줄을 뽑아 들려준다면 어떤 글을 고를까? 이제 내가 북 큐레이션 마스터가 됩니다. 혼자 읽고 마는 것과 글로 써서 남기는 것, 독서는 나를 위한 행위이지만, 글로 남기는 것은 타인을 위한 행위입니다. 우리는 타자를 위해 일할 때, 성장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사는 것, 그 자체로 의미가 있거든요.

저는 운동 삼아 산책하는 걸 좋아합니다. 그냥 하면 남는 게 없어요. 기왕 하는 거, 서울둘레길 산책을 합니다. 1구간부터 완주를 하고, 그중 좋은 코스를 소개합니다. 산티아고도 좋고, 제주 올레길도 좋지만, 돈도 안 되고 시간이 안 되면 전철 타고 서울 둘레길부터 걷자고 말합니다. 이제 제가 블로그에 올린 사진과 글이 다른 사람에게 무료 가이드북이 됩니다. 제가 쓴 글을 보고, 집근처에 있는 맛집을 찾고 멋진 풍광을 찾아갈 수 있어요.

10년 넘게 영어 공부를 했어요. 그동안 느낀 영어 잘 하는 비결을 6개월 동안 글로 쓰고 책으로 묶었어요. 누군가 그 책을 반나절 만에 읽었다면, 그 사람은 시행착오의 시간 10년을 버는 셈입니다. 통역대학원을 나왔지만 정작 영어를 써먹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는데요. 나의 영어 공부를 책으로 만드니,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더군요. 내가 글로 남긴 시간은, 남들에게 남는 시간이 됩니다.

무엇을 글로 써야할까요? 딱히 쓸 이야기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기록하면 남습니다. 1996년에 MBC PD로 공채 입사했습니다. 공대를 나와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느라 방송 연출이나 영상 문법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은 피디가 될 수 있을까? 선배에게 물어보니, 좋은 영화를 많이 보라고 하시더군요. 회사 자료실에 가서 매일 3편씩 영화를 빌려 봤습니다. 좋은 영화는 왜 좋은지, 한줄 평과 점수를 매겼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쓴 리스트가 아닙니다. 글로 남길 때, 내가 발전한다는 걸 알아요. 아니 적어도 이렇게 긴 리스트를 완성하고 나면 자신감이 생깁니다. ‘1년에 200편의 영화를 봤으니, 적어도 연출가로서 영상 감각은 길렀겠지.’ 데뷔작인 <뉴논스톱>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연출상을 받았어요. 2012년에 첫 책을 냈는데요. 2쇄를 찍고, 출판사가 문을 닫았어요. 그 바람에 절판되었지요. 다음 책을 쓰려고 편집자에게 물어봤어요. ‘책을 잘 쓰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책을 많이 읽고 좋은 글을 필사하라고 하더군요. 필사적으로 필사했어요. 2016년 한 해 동안 250권의 책을 읽고 블로그에 리뷰를 올렸습니다. 그렇게 쓴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1년 동안 12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요.

2015년에 드라마국에서 쫓겨나 유배지로 발령이 났습니다. ‘퇴사를 할 것인가, 버틸 것인가.’ 그때 시트콤에서 우연히 이런 내용을 봤어요. 일을 때려치우고 나온 루이에게 대선배가 이런 말을 합니다. “버텨야한다. 잘리는 거야 할 수 없지만, 제 발로 나오지는 말아야 한다.” “버티면 언젠가 상황이 좋아질까요?” “아니? 상황은 좋아지지 않는다. 단지 너는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냥 보고 지나쳤다면, 잊혀질 내용이지요. 이걸 글로 썼어요. 글로 쓰다 보니, 극중 화자가 마치 제게 위로를 건네주는 것 같았어요. 그 글이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의 프롤로그가 되는데요. 직장 생활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 많은 분들이 그 글을 읽고 위안을 얻었다고 해요. 원래 저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쓴 글이었는데, 다른 분들께도 위안이 되었다니 감사한 일이지요. 저는 제가 쓴 글 덕분에 회사에서 버틸 수 있었어요.

부당한 인사발령에 대해서는 화가 나지요. 그 순간의 억울함, 분함, 다 글로 남겨뒀어요. 하소연만으로는 아쉬우니까 글을 쓰며 생각을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해야 오늘의 괴로움이 내일의 즐거움으로 바뀔 수 있을까? 블로그에 대고 징징거리지만 말고, 뭐라도 신나고 재미난 일을 하자, 결심해요. 책이며, 영화며, 여행이며, 즐거움으로 채운 나의 일상을 블로그에 남깁니다. 그게 또 두 번째 책 <매일 아침 써봤니?>의 프롤로그가 됩니다.

지난번에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에 출연했을 때, 저는 <행복의 기원>이라는 책 이야기를 했지요. 그 책을 왜 읽었을까요? 당시 제 삶이 너무너무 힘들었던 겁니다. 행복을 간절하게 바랐기 때문에 행복심리학자가 쓴 책을 읽었던 겁니다. <세바시> 강연을 위해 원고를 쓰면서,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겼어요. 그냥 책을 읽고 지나치는 것과 글로 쓰는 것은 울림이 다릅니다. 책 속의 글은 저자의 생각이지만, 그걸 나의 글로 풀면서 내 것이 됩니다. 나중에 페이스북이나 네이버에 올라온 그 <세바시> 강연을 보면서, 문득 그런 생각을 했어요. ‘행복이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면, 싸움도 강도가 아니라 빈도가 아닐까.’ 우리는 항상 큰 거 한방으로 인생역전을 꿈꿉니다. 싸움에서 이기는 길은, 조금씩 매일 잽을 던지는 겁니다. 매일 한번 씩 화장실 갈 때마다 사장님 나가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경위서를 내라고 하면, 경위서를 쓰고 또 외쳐요. 대기발령을 내면, 또 외치고, 징계를 내도 또 외칩니다. ‘이러다 진짜로 잘리면 어떡하지?’ 겁이 덜컥 나더군요.

그때 <세바시>에서 제 강연을 페이스북에 새로 올리셨어요. ‘이제 그에게 연출을 허하라는 태그를 달아서. 많은 분들이 좋아요를 누르고 응원의 댓글을 달아주셨어요. 그 반응을 보면서 다시 용기가 불끈 납니다. 여러분이 써주신 댓글이 제게 응원의 마음으로 남은 거지요. 그 덕에 힘을 내어 더 열심히 싸웠고, 이제는 드라마국에 복귀해서 5월 주말특별기획 연출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세바시> 제작진과 시청자 여러분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여러분이 제 꿈을 이뤄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인생이 힘들 때, 내가 처한 상황을 글로 적으며 현실을 들여다보고, 다음으로, 내가 꿈꾸는 미래에 대해, 적어봅니다. 그리고 그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기록합니다. 기록을 하면서 내면에 무언가 쌓이고 단단해져가는 것을 느낍니다. 글을 쓰면서 내 삶의 고난에 대해 의미를 부여했고요, 그렇게 의미를 부여한 일상이 하루하루 쌓여서 나의 지금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쓰는 인생이 남는 인생입니다.


(이렇게 원고를 써서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제작진에 보냈습니다.

여기에 대해 제작진이 보내온 피드백을 공유할게요.

글은 한번에 쓰는 것이 아니라, 고쳐 쓰는 것이라는 걸 보여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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