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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매일 아침 써봤니?

답을 모를 땐, 뭐라도 쓴다

by 김민식pd 2018. 2. 19.

고등학교 2학년 중간고사 때 일입니다. 국사 시험 마지막 문제는 주관식이었어요. 

‘최치원의 사산비 중 하나의 이름과 그 소재지를 쓰시오.’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 최치원이 글을 지은 비문이 전국에 4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쓰라는 문제였습니다. 최치원이 쓴 네 개의 비문(碑文), 사산 비명(四山 碑銘)이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산(山)이란 선종을 뜻하는데, 결국 사산 비문이란 선종 승려 및 사찰에 관한 비문입니다.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대숭복사비,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 중 하나를 쓰라는 거지요. 국사 시간에 배우긴 했는데 막상 쓰라고 하니,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어요. ‘다음 4개 보기 중 사산비가 아닌 것을 찾으시오.’ 라는 객관식 문제라면 찍기라도 할 텐데, 하필 주관식이었어요. 잔인한 역사 선생님! 답지에 빈 칸을 남기기는 싫어 머리를 쥐어뜯다 최선을 다해 답을 적어냈습니다.

일주일 후 국사 시간, 엄숙한 표정 탓에 상영 대사라는 별명을 가진 이상영 국사 선생님이 교실에 오셨어요. 웬일인지 그날따라 표정이 더 무섭더군요. 선생님은 채점한 답지를 들추며 몇몇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셨어요. 네 명의 학생들이 나오자 칠판에 손을 짚고 엎드리게 하여 줄빠따를 놓으셨습니다. “뭐? 상영대사 송덕비? 무학산 소재?” 선생님의 별명으로 발칙한 비명을 만든 아이들의 비명이 학교 뒷산인 무학산에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감히 선생님의 존함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니, 맞아도 싸지........’

“너희들은 이제 들어가.” 선생님은 다시 답안지를 뒤적이셨습니다. 약간 불안해졌어요. “35번, 김민식, 앞으로 나와!” 쭈뼛쭈뼛 나갔더니 선생님이 코앞에 내 답안지를 들이미셨다. 

“뭐? 에베레스트 산에 뭐가 있어? 민식 대왕이 어쩌고 어째?” 

그래요, 저는 채점에 지치신 선생님께 작은 웃음을 선사하고자 이렇게 적었습니다. 

‘민식 대왕 세계정복 기념비, 에베레스트 산 소재.’ 

저의 기획 의도는 실패였나 봐요. 답안은 웃음보다 분노를 불러일으켰는지, 수업 끝나고 교무실에 불려가 오래도록 매를 맞았어요. 당시의 일은 ‘상영대사와 민식 대왕의 교무실 대첩’이란 이름으로 회자되었지요.


매일 아침 블로그에 글을 씁니다. 인생이 내게 던진 질문에 어떻게든 답을 하려고 해요. '영어를 잘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이를 잘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창의성을 키우려면 뭘해야 할까?' '정년 퇴직 후에도 일을 하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많은 질문을 놓고 나름의 답을 올리지만, 때로는 글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어요. 그럴 땐, 고교 2학년 시절, 주관식 문제를 앞에둔 김민식을 생각합니다.


답이 떠오르지 않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나만의 답을 하려고 합니다. 물론 정답이 아닐 수도 있고, 무리수를 던져 선생님께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지요. 하지만 만약 선생님이 지금 제가 코미디 피디로 일하고 있고, 책을 쓰는 저자라는 걸 알게 된다면 그러지 않으실까요? '그래, 그 녀석은 어린 시절부터 끼가 있었어.' 

뭐, 당시엔 싹수가 노란,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셨겠지만요. 


민식대왕 세계정복 기념비...

ㅋㅋㅋㅋㅋ


무슨 생각으로 그런 답을 썼는지 참... 

그래도 어때요? 덕분에 재미난 추억을 하나 남겼고, 이렇게 블로그 글감도 하나 건졌으니, 그걸로 된 거죠.

 

인생이 내게 질문을 던질 때, 

답지에 빈칸은 남겨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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