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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피디란 공감하는 직업이다.

by 김민식pd 2017. 9. 20.

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2017/09/18 - [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 가슴이 울었기 때문에 파업에 나선다

2017/09/19 - [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 어린 시절의 괴로움이 지금의 즐거움

방송사에 입사한 후, 좋아하는 연예인들을 만나고, 만들고 싶은 프로그램을 마음껏 만들었어요. 어려서는 죽도록 괴로웠으니, 어른이 된 후로는 무조건 즐겁게 살자고 마음먹었어요. 예능국에 입사해서 청춘 시트콤 뉴 논스톱을 만들고 일밤 박수홍의 러브하우스도 만들었어요. 나이 마흔에는 드라마를 해보고 싶어 사내 공모를 통해서 직군을 옮겼어요. 면접을 봤는데요,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심사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어요. 설득력과 논리력도 독서로 키우거든요. 드라마 피디가 되어 내조의 여왕’ ‘글로리아를 만들었어요. 지난 7년 동안 제 이름으로 된 드라마를 만들지 못한 탓에 여러분이 알거나 좋아할만한 프로그램이 없네요.

2011년에 MBC 노동조합에서 부위원장으로 일해 달라는 제의가 왔어요. 저는 원래 정치나 노동조합 활동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그냥 혼자 즐겁게 사는 날라리에 딴따라였거든요. 드라마 PD로 일할 때 즐거웠던 이유는 모든 일을 내가 직접 결정했기 때문입니다. 작가도, 배우도, 스태프도, 내가 직접 선택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만나, 내가 좋아하는 스태프들과 일을 해야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이 즐겁고요, 과정이 즐거워야 결과물을 보는 시청자들도 즐거울 거라 믿습니다.

회사가 저의 제작 자율성을 존중해준 것은 제가 예뻐서가 아니에요. MBC 노동조합이 회사와 단체협약을 체결하고 피디나 기자들의 제작 자율성을 지켜준 덕이지요. 그런 고마운 노동조합을 위해 조금이나마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노동조합 집행부가 되었어요. 당시만 해도 일하는 즐거움을 최고로 치는 제가, 파업에 나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시사 교양 피디와 라디오 피디도 자신이 찍고 싶은 아이템으로, 자신이 선택한 출연자와 작업을 해야 행복합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내려 보낸 낙하산 사장은 그걸 못하게 했어요.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방송장악을 다룬 영화, ‘공범자들을 보면 그들이 MBC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을 망가뜨리기 위해 얼마나 집요했는지 알 수 있어요. ‘김미화의 세계는 우리는을 진행하던 MC 김미화를 내쫓고요. 13년간 청취율 1위를 달려온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패널을 자르고 작가를 내쫓습니다. 그렇게 시달리다 결국 MC인 손석희 아나운서가 그만두고 jTBC로 옮겨 가게 되지요. 손석희 앵커는 jTBC 보도부문 사장이 되면서 제작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 결과 jTBC의 보도를 통해 최순실 국정 농단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어쩌면 MBC를 망가뜨린 덕에 jTBC 뉴스의 세기적 특종이 나왔는지도 몰라요.

저는 2011년 노조 부위원장으로 일하며 라디오 피디들과 시사교양 피디들이 회사로부터 탄압 당하는 모습을 다 봤어요. 그런 상황에서 저건 내 일이 아니니까.’하고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어요. 결국 2012년에 파업에 돌입합니다. 김태호 피디가 예능 피디는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고 했는데요, 드라마 피디는 공감 능력이 큰 사람입니다. 대본에 나오는 숱한 인물들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어야, 드라마를 제대로 찍을 수 있거든요. 허구의 인물에게도 감정이입하는 사람이, 정작 내 주위 동료들의 아픔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어린 시절, 따돌림을 당할 때, 많이 힘들었어요. 아이들이 놀려서 괴로운 게 아니라, 누구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 괴로웠어요. 언젠가 어른이 된다면, 주위에서 누군가 괴롭힘을 당할 때 적어도 외면하지는 말자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노조 집행부가 되고 파업에 나선 것은 어린 시절의 다짐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 *이 원고는 <소년소녀, 정치하라!>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우리학교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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