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어린 시절의 괴로움이 지금의 즐거움

by 김민식pd 2017. 9. 19.

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2017/09/18 - [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 가슴이 울었기 때문에 파업에 나선다

저는 드라마 PD입니다. ‘내조의 여왕이나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 ‘글로리아같은 로맨틱 코미디를 주로 연출했어요. 2012년 파업 당시 노조부위원장으로 일한 후, 대기발령, 정직 6개월, 교육 발령 등의 징계 3종 셋트를 받기도 했어요. 검찰은 당시 제게 구속영장을 2회 청구하고, 업무방해죄로 징역 2년형을 구형하기도 했지요. 물론 법정에서 다 무죄로 판결을 받긴 했지만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드라마 피디는 공정 보도 같은 파업의 쟁점 사안과는 별로 관계없는 직종인데, 왜 파업에 나서게 되었을까요?

제가 PD가 된 건 어린 시절 왕따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다섯 살 때, 저는 초롱불 위로 넘어졌다가 턱에 커다란 화상 흉터를 얻었어요. 까만 흉터가 신경 쓰여서 얼굴을 까맣게 태웠어요. 마른 체격에 까만 얼굴, 두꺼운 입술을 가졌다고 고등학교 친구들이 아프리카 깜둥이라고 놀렸어요. 고등학교 때 성적은 반에서 중간 정도였어요. 내신 성적 15등급에 7등급이었지요. 집에서 공부를 잘하지 못한다고 많이 혼났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학교 선생님인데요, 저의 비교 대상은 전교일등들이었어요. 아버지는 매를 들 때마다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 학교 전교 일등은 말이야.’ 학교에선 놀림 받고 따돌림 당하고, 집에서는 구박 받고 매를 맞았어요. 사는 게 힘들어 고등학교 때 자살 시도도 했는데요, 겁이 많아서 성공하진 못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천만 다행이지요. 사는 게 이렇게 재미난 지 그땐 몰랐거든요.

혹시 여러분 중 외모나 성적, 부모 때문에 고민하는 친구가 있나요? 제가 해결방안을 알려드릴게요. 세 가지 문제는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됩니다. 그냥 사는 거예요. 하루하루 살면서 나이 들면 됩니다. 10, 20대에는 외모 때문에 고민이 많지요? 나이 40 넘으면 외모 걱정은 절로 사라집니다. 나이 40 넘으면 아무리 예쁘고 잘 나봤자 다 아줌마 아저씨에요. 나이 50, 못생긴 외모 탓에 사는 게 불행하다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불행한 건 외모 탓이 아닐 거예요. 청소년 시절에는 학교 성적 때문에 고민이 많지요? 학교를 다니는 어린 시절에는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이 금세 티가 납니다. 어른이 되면 공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사회에서 필요한 능력은 다양하거든요. 교과서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푸는 것 말고도 다양한 재능이 사회에서는 필요합니다.

어른들이 그럴 거예요. “나이 20에 어느 대학, 어느 학과를 다니느냐로 남은 평생이 결정 난단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저는 한양대 자원공학과를 나왔는데요, 대학에서 석탄채굴학이나 석유시추공학을 배웠어요. 그런데도 PD로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대학 전공과 다른 직업을 얻어 사는 사람도 많아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에요. 어려서는 부모님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스무 살이 넘으니 부모님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어요. 따로 살면 되거든요.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님 때문에 고민이잖아요? 그럼 여러분 잘못이 아니에요. 부모가 이상한 거예요. 스무 살이 넘으면 한 사람의 성인이라 자식도 남이에요. 남의 인생에 참견하는 게 잘못이지, 여러분 잘못이 아니에요.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 제게 준 선물이 있어요. 바로 책 읽는 습관입니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늘 힘들었기에, 저는 은신처를 찾아 숨었어요. 제겐 학교 도서실과 동네 도서관이 피난처였어요. 힘들 때마다 도서실에서 가서 재미난 소설을 읽었어요. 현실이 아무리 힘들어도 책을 펼치면 현실에서 벗어나 책 속의 세상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어요. 대학에 올라가서는 1년에 200권씩 책을 읽었어요. 그 덕분에 MBC에 피디로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방송사 공채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관문이 논술과 면접인데요. 글쓰기와 말하기 실력을 키워주는 가장 좋은 방법이 독서거든요.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

 *이 원고는 <소년소녀, 정치하라!>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우리학교 출판사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