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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천천히, 조금 더 천천히

by 김민식pd 2017. 9. 14.

호모 코레아니쿠스 (진중권 / 웅진지식하우스)에서 저자 진중권은 한국 사회의 발전은 유독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서구에서는 봉건제 농업 사회에서 산업혁명을 거쳐 다시 정보 사회로 전환하는데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렸어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다시 정보사회로 바뀐 것이 유난히 짧은 시간에, 거의 한 세대 안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즉 압축 성장으로 한국인의 몸속에는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의 세 지층이 다 있다는 거지요. 노년층은 농경적 신체, 장년층은 산업적 신체, 신세대는 정보적 신체가 우세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농경사회에서 전문가는 노인입니다. 동네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이 가장 현명한 사람이라는 대접을 받았어요. 농업에 필요한 지식은 그리 복잡하지 않은 대신 세월을 통해 축적되는 경향이 컸어요. 가뭄이 심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수십 년 전 심한 가뭄을 겪어본 할아버지가 제일 잘 아는 거지요. 산업사회에서 전문가는 엘리트 지식인입니다. 대학을 나오고 직장에서 경험을 쌓아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가진 전문 지식인이 우대받는 사회였지요. 정보사회에서는 누구나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방대한 지식을 검색하고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만드는 것이 너무 쉬워졌거든요.

탄핵 정국에서 노인들이 광화문 일대로 쏟아져 나왔어요. 그들은 촛불 집회로 거리를 메운 청년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쟤들은 1960년대 우리가 얼마나 가난했는지 몰라.’ ‘어린 것들이 나이 든 사람 말을 무시하네?’ 농경 사회에 익숙한 노인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느끼기 힘들어요. 아니 오히려 너무 빨리 변하는 세상과 이질감을 느끼지요.

모든 시대에는 보존해야 할 고유의 역사적 성취가 있답니다. 전근대적 문화라 해서 모두 척결의 대상인 것은 아니에요. 서구에서도 귀족문화는 근대적 형태로 변용되어 시민사회에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가 서양문화라고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것, 미술 음악 문학 등은 거의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어요. 클래식 음악만 해도 궁정 음악이 그 시작이었어요. 조선시대에도 양반문화가 있었어요. 그 속에는 인간적 가치, 인문적 교양, 귀족적 명예가 있었지요. 하지만 우리는 양반문화의 역사적 성취는 버리고, 척결해야 할 신분제 의식을 계승했습니다. 한국의 천민성은 여기서 비롯된다고 진중권 선생은 말합니다.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양반이 되고 출세하는 것이 중요한 시간이 있었어요. 우리가 과도한 사교육에 올인하는 이유가 거기 있지 않을까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일자리를 얻는 것을 신분 상승의 기준이라 생각하는 거지요. 앞으로는 공부나 일보다 놀이에 좀 더 의미를 부여했으면 좋겠어요. 옛날 선비들에게 공부는 어쩌면 놀이였어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군자를 치는 것이 문화의 향유였지요.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공부를 놀이가 아니라 전쟁으로 치릅니다. 무한 경쟁으로 아이들은 놀 줄 모르는 전사가 되었고요. 어른이 되어서도 효율을 중시하는 산업사회의 신체에 빠르게 적응합니다. 시스템과 매뉴얼의 명령과 규율에 충실한 사람에게 창의성이 깃들기를 바라기란 쉽지 않습니다. 시험지 위의 문제를 푸는 능력이 현실 속의 문제 해결 능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사회 한 가운데에서 어쩌면 자신만의 시간을 찾는 노력이 중요할지도 몰라요. 조금 더 느리게, 나만의 것을 찾아가는 시간. 공부와 일에 매몰되기보다 질문을 던지고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오늘 하루, 삶의 쉼표를 찾아 잠시 쉬어가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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