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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로 즐기는 세상/2017 MBC 파업일지

저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라도

by 김민식pd 2017. 9. 1.
(며칠 전 MBC 집회에서 이근행 언론노조 MBC본부 전 위원장이 조합원들에게 한 발언을 옮깁니다. 구로에 있던 이근행 선배와 양효경 기자 등은 MBC 총파업에 함께 하기 위해 전날 유배지에서 짐을 빼어 나왔습니다.)

오랜만입니다. 6년 반 만입니다.
여러분들에게 힘이 될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참 판단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임 위원장이 아니라, 한 조합원으로서, 똑같은 욕망과 고민을 지니고 사는 한 인간으로서,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걸로 이해해 주십시오. 

감정이 강퍅해져서 큰일입니다.
원래 예민하기도 하고 감정과잉도 있어서 늘 애쓰기는 합니다. 예전에는 눈물도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수 년 새 많이 달라져 버렸습니다.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어제 조합에서 구로유배지로 촬영을 왔었습니다.
양효경이 울었습니다.한참을 울었습니다. 말을 하다 다시 울었습니다. 저는 제 눈물샘이 작동하는 걸 느낄 수 없었습니다. 아 효경도 우는구나, 했습니다.
김민식이 근래 인터뷰하다 자주 울었습니다. 송출실에서  같이 근무할 때 즐겁기만 했던 김민식입니다. 김민식의 익숙한 웃음과 비현실적 울음이 너무 급격하고 진폭이 커, 혹여 조울증같다 느꼈습니다.

어쩌면,
말이 많은 양효경도,  늘 즐겁게만 보였던 김민식도, 감정을 상실해가는 저도 정상이 아닙니다.
상처입고 불행해진 인생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비슷합니다.
누구에게나 물욕과 명예욕이 있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어렵지 않게 분간합니다.
그럼에도,
지난 9년간,
자기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손해를 감수하고 ,인간적 수모를 당하고, 속깊은 상처를 입은 기백명의 동지들에게 피붙이 이상의 깊은 연민과 애정을 느낍니다. 
또한 이익과 회유와 암담한 현실에 끝내 굴복하지 않고,
오롯이 스스로 자존을 지켜낸 인간 각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밥상을 차려주는데 자리를 차고 일어선 이들을 이해하고 존중합니다. 숟가락을 들어 밥을 먹으면서, 마치 모래알을 씹는 거 같았다거나, 밥을 먹고도 배가 부르지 않았다거나, 그렇게 말할 순 없는 노릇입니다.

살다보니 , 
나쁜 놈은 늘 나쁜 놈입니다.
이익을 쫓는 이는 늘 이익을 쫓습니다.
악은 더 큰 악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살아남고
이익은 더 큰 이익을 쫓아 움직이는 게 생리입니다.
악에 더 부지런하고 이익에 더 전전긍긍합니다. 

저는 김재철의 농간으로 갑자기 특별채용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습니다.
호봉도 근속도 날려버린, 불명예와 치욕의 귀환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래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돌아가자. 

혼자 다짐했습니다.딱 한 번만 더 싸우자. 저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라도 이길 수 있다면 가자.  그래도 안되면 미련없이 MBC를 떠나자.

 

ⓒ 권우성 (오마이뉴스)


촛불과 탄핵과 정권교체가 없었다 생각해봅니다.
수구세력의 집권연장가능성이 절반쯤이라도 있었다면, 그랬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상황속에 있겠습니까?
저는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만의  처절한 최후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어차피 죽음만이 남아 있었을 테니까요.
정권교체가 없었다면 이우환 피디는 스케이트장에서 해고되었을 것이고, 양효경과 김수진은 유배지와 변방을 떠돌다가 회사를 떠나야 했을 겁니다. 김민식 또한 드라마 곁에도 가지 못하고 해고되거나 떠나야 할 겁니다.

김장겸이 그랬습니다.
낭만적 파업이라고.
우리가 얼마나 우습게 보였던 것일까요.
잠을 못자 약을 먹고, 동료들이 떠나가는 것을 가슴찢어지게 바라보아야 했던  이들의 피맺힌 절규가 한갓 낭만이라니요.
독해집시다. 처절해집시다.

싸움은,
지고도 승리하기도 하고,
이기고도 패배하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두 번의 파업은 지고도 이긴 것이라 생각합니다.
싸워야 할 때 피하지 않고 싸웠기 때문이고,
끝내 굴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싸움은 이기고도 패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어진 판이기 때문입니다.
처절하지 않으면 지는 겁니다.
철저하지 않으면 지는 겁니다.
타협하면 지는 겁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되면 지는 겁니다.
우리 안의 적폐를 청산하지 못하면 지는 겁니다.

부끄럽더라도 힘을 냅시다.
그리고 우리 MBC의 영광을 땀흘려 재현해 냅시다.
그것이 오늘의 이 상황을 만들어준
국민의 명령입니다.

6년 반 전의 이근행 위원장입니다.

이제 마지막 싸움이 임박했습니다.

이 싸움, 꼭 이기고 싶습니다.

저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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