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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여행예찬/짠돌이 국내여행

제주도 숲길 여행

by 김민식pd 2017. 6. 26.

2017 봄, 마님과 제주도 여행 3일차

 

여행을 준비하면서 아내에게 물어봤어요.

"이번에 제주도 가면 어디 가고 싶어? 당신이 테마를 정해줘. 그럼 코스는 내가 짤게."

"아이들 없이 가니까 호젓한 숲길을 걷고 싶어."

아이들과 제주도에 가면 바닷가 해수욕장이나 관광지 위주로 다녔어요. 중문 단지에 콘도를 구하고 민서가 좋아하는 헬로 키티 뮤지엄을 가거나, 민지가 좋아하는 승마장을 가고, 외돌개나 일출랜드같은 유명 관광지를 다녔지요. 아이들은 장모님께 맡기고 둘만 왔으니, 마님의 소원대로 어른들의 여행 코스를 짭니다.

  

아침에 일어나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섭지코지에서 가까운 성산 일출봉입니다. 제주도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지요?

(자료사진)

성산 일출봉의 항공 사진이지요.  

(자료 사진)

섭지코지에서 본 성산일출봉의 모습. 어제 아내가 그러더군요.

"어? 저기에도 오름이 있네?"

ㅠㅠ

"당신, 성산 일출봉 몰라?"

"저게 성산 일출봉이야? 저것도 오름 아냐?"

"어떤 남자가 평생의 꿈이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사는 거야. 드디어 돈을 모아 할리를 뽑아서 여자 앞에 딱 나타났어. 그런데 여자친구가 그러는 거지. '어마? 오빠 스쿠터 새로 샀네?' 성산 일출봉을 그냥 오름이라 부르면, 일출봉이 좀 서운할 걸?"

일전에 가족 여행차 왔을 때, 어린 민서가 계단 오르기 힘들어해서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어른들끼리 오니 이번에는 정상까지 갑니다. 

'울 마님, 그동안 애 키우느라 좋은 데도 못 갔구나, 앞으론 내가 잘 모시고 다닐게.'

렌터카를 몰아 사려니 숲길로 향합니다. 평소엔 비자림을 즐겨갑니다. 아기자기한 코스에 화려한 식물군. 워낙 유명한 관광지라 사람이 좀 많지요. 조용한 숲길 산책이라면, 한라산 중턱에 있는 사려니 숲길도 괜찮아요. 주차장을 찾는게 좀 불편한데요. 편의 시설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이 덜 찾는 곳이라는 뜻이니까, 뭐... ^^

본격적인 숲길 산책, 시작.

바닥에 야자나무 잎으로 만든 매트가 이어집니다. 이 길을 따라 걸으면 힘들지 않아요. 길 밖을 벗어나면 수풀이 무성해져 걸어가기 힘들어요. 인적이 드문 길은 관목들이 빠르게 길을 덮습니다. 가급적 반바지보다는 긴 바지에 발목까지 덮는 양말을 신고 걷는 편이 좋습니다.

혼자서 씩씩하게 잘 걷네요. 항상 회사일로, 집안일로, 바쁘기만 한 마님이 주말에 이렇게 숲길을 걷는 모습, 보기 좋아요. 평소라면 수다를 떠는 저도, 오늘은 묵언수행하듯 입을 닫고 멀찌감치 뒤에서 마님만 쫓아갑니다. 아내가 조용한 숲 속의 정취를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요.

한 시간 정도 걸어 사려니 숲을 돌아본 아내가, '벌써 끝이야?' 하기에, 모시고 한라산으로 향합니다. 사려니 숲 근처 성판악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라산을 오릅니다. 백록담까지 가는 등산이 아니라, 한라산 숲을 즐기는 산책입니다.

산행 초보자들에게는 사라오름까지 왕복 4시간 코스가 좋습니다. 길이 잘 정비되어 있어 가벼운 운동화 차림으로도 갈 수 있어요. 평소 산행을 즐기지 않는 마님이지만 야트막한 숲길을 따라 어렵지 않게 산을 오릅니다.

사라오름 전망대로 가는 길입니다. 가물어서 산정호수가 마른 게 좀 아쉽네요.

맑은 날이면 저 멀리 백록담과 바다가 보일 터인데, 오늘은 날이 흐려 사방이 다 구름입니다. 운무 속에 서 있는 걸 보면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실감이 나네요.

마님과 숲길을 걸을 때, 아내가 앞장 서서 걷도록 합니다. 두 사람이 산길을 걸을 때, 산행이 미숙한 사람이 앞에 서서 가는 편이 좋습니다. 산에 익숙한 사람이 성큼성큼 앞장 서서 걸으면 따라 오는 사람이 쳐집니다. 사이가 벌어지면, 앞서 가던 사람이 앞에서 기다리는데요, 따라 잡으면 금세 다시 출발합니다. 즉 산을 잘 타는 사람은, 자신의 페이스 대로 산을 오르면서 휴식도 자주 취하는데요, 산을 못 타는 사람은 잘 타는 사람 페이스 맞추느라 힘들고 제대로 쉬지도 못해서 더 힘들어요. 

커플 산행시, 미숙한 사람이 앞장을 서고요, 뒤에 가는 사람은 적당히 간격을 유지하면서 따라가는 편이 좋습니다. 원래 뒤에 쫓아가는 게 체력 소모가 더 심하거든요. 그리고 한라산이나 사려니숲길처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은 길만 따라가면 되니까 초심자가 혼자 앞장서서 걸어도 부담이 없어요. 갈림길이 나오면 잠시 쉬면서 뒷사람이 쫓아오기를 기다리면 되니까요.

도보 여행이나, 자전거 여행도 마찬가지에요. 미숙한 사람이 앞에 가고 능숙한 사람이 뒤에 가는 게 좋아요.

해발 1000미터! 마님의 표정이 밝습니다. 초심자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작은 성취감이지요.  

17년 간의 결혼생활도, 서로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왔네요. 저는 자기주도적 인생을 사는 터라, 일을 저지를 때, 마님에게 먼저 허락을 구하는 법이 없습니다. 최근에 회사에서 벌인 일도 그래요.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합니다. 마님은 저 뒤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 가타부타 뭐라 하는 법이 없어요. 가끔 농삼아 그러시지요.

'우리 남편, 회사에서 잘려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먹여 살릴 테니.'

마님은 저보다 연봉이 훨씬 높은 능력자이십니다. ^^

 

'앞에서 끌지도 않고, 뒤에서 붙잡지도 않는다. 그냥 서로가 가는 길을 존중하며 조용히 쫓아간다. 그가 무엇을 하든, 뒤는 내가 지켜준다는 생각으로.'

부부가 인생을 사는 법이 이런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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