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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가버린 친구에게 바침

by 김민식pd 2017. 5. 29.

외대 통역대학원 재학 시절, 친구들끼리 사자성어로 끝말잇기를 했습니다. 사자성어는 통역사들에게 아주 유용합니다. 길게 풀어야 할 상황을 사자성어로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거든요. 통역에서 유용한 것은 축약의 기술이니까요. 기억에 남는 끝말잇기가 있어요.

계구우후!” (소의 꼬리보다 닭의 부리가 되어라는 뜻)

후안무치!”

?....... ...... 치사빤쓰!”

? 치사빤쓰? 그건 좀 치사한데.... 그럼.... 쓰리세븐!”

? 쓰리세븐? , 븐으로 시작하는 말이 어디 있어.”

그럼 커피 사시든가.”

븐이엘고!”

뭐라고?”

브니엘고 몰라?”

^^

 

MBC에 입사하고 97년 수습 기간에 신입 PD들이 인사동 전통찻집에 모여 논 적이 있는데요, 영화 이야기가 끝없이 이어졌어요. 다들 키노와 씨네21을 정독하고 심지어 온갖 어려운 이름을 다 외우기까지 하더라고요. 문득 심심풀이 삼아 끝말잇기를 했어요. 영화에 나오는 고유명사만 가지고. 영화 제목이나, 감독 이름, 배우 이름으로 끝말잇기를 했는데, 세상에, 그 게임이 한 시간 넘게 이어졌어요. 짜릿했어요. ‘, 여기야말로 내가 있어야 할 곳이로구나.’ 평생 이과, 공대, 영업사원, 통역사 등, 다양한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지만, 그제야 나의 준거집단을 만난 기분이었어요. 그날의 뿌듯함이 20년이 넘도록 MBC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미친 듯이 좋아하는 친구들이 많거든요.

 

MBC에서 책을 쓰는 사람이 늘었어요. 지난 몇 년, 회사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일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서 자아실현의 기회를 찾고 있는 사람이 늘었다는 거지요. 최근 <열정적 위로, 우아한 탐닉>이라는 책을 낸 조승원 기자가 있는데요. 그가 책을 쓴 사연도 재미있습니다.

 

 

2004년 11월 MBC 시사매거진 2580에서 일하던 조승원 기자는 '대마초는 마약이다?'라는 아이템을 준비하면서 신해철 씨에게 연락을 합니다. 가수는 발끈하지요. "왜 또 납니까? 이제 좀 잊고 조용해지려고 하는데." 기자가 배수진을 쳐요. "신해철 씨만큼 이 문제에 대해 논리 정연한 사람이 없다고들 하는데, 인터뷰 안 해주시면 이 아이템 방송 못 탑니다." 신해철이 이 당돌한 기자를 작업실로 불러요. 두 사람은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964년 비틀즈가 밥 딜런과 대마초를 나눠 피운 이야기부터 희대의 술꾼인 오지 오스본과 이글스의 음주 기행에 이르기까지 음악인들의 뒷담화가 모락모락 피어납니다. 어느 순간 동이 터고 있었다네요. 기자와 헤어지면서 마왕이 그러지요.

"우리 둘이서 한 얘기, 책으로 내면 재미있지 않을까? 언제 시간 되면 이런 거 한번 책으로 써봐."

마왕 신해철을 만나 밤새 술과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조승원 기자는 아마 행복했을 겁니다. 제가 인사동에서 영화광 PD들과 함께 한 순간이 그랬던 것 처럼요. 가끔 저에게 묻는 사람이 있어요. MBC에서 나와 프리랜서 연출을 하지 않느냐고. 어떻게 떠날 수가 있겠어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재미난 사람들이, 매력적인 사람들이 모인 회사를. 

저는 술을 좋아하지도, 음악을 잘 알지도 못합니다. 하지만 조승원 기자의 책을 읽으면서 글에 취하고, 음악에 젖었어요. 기자의 술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존경합니다 술과 음악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못배기는 그의 글을 좋아합니다. 마왕도 이 책을 보면 흐뭇하게 술 한 잔 할 것 같아요.

책의 서문이 실린 조승원 기자의 브런치 글을 소개합니다.

https://brunch.co.kr/@beautyalcoholic/5

'나는 왜 <열정적 위로, 우아한 탐닉>을 썼나.'

술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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