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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나의 최애작가, 이기호

by 김민식pd 2017. 5. 17.

재미난 책이라면, 가리지않고 다 읽는 편인데요. 그중에서도 제가 특히 좋아하는 작가는 소설가, 이기호 님입니다. <최순덕 성령충만기>, <김 박사는 누구인가>, <갈팡질팡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기호 소설집을 읽을 때, 종합선물셋트를 받은 아이처럼 마냥 행복했어요. 이야기마다 빵빵 터지고, 그러다 또 멍해지고... 와, 타고난 문재란 이런 것이구나. 감탄을 하면서 봅니다. <웬만해선 아무렇지 않다> <차남들의 세계사> <사과는 잘해요>같은 장편 소설을 봐도, 놀라워요. 어떻게 긴 내러티브 속에 이렇게 속사포처럼 이어지는 개그 펀치를 구사할 수 있는 걸까?

예스 24 온라인 서점에 책을 사러 갔다가, 이기호 작가님의 신간 소식에 바로 주문 버튼을 눌렀어요. 평소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중고서점에서 바꿔보고, 친구에게 얻어서 읽는 짠돌이 독서가이지만, 최애 작가의 경우, 주저없이 신간을 주문합니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 마음산책)

 

예전에 월간지에서 작가의 가족 이야기를 소설 형식으로 쓴 걸 보고, 이기호 작가님 글 보고 구독 신청해야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있는데... (워낙 짠돌이인지라 구독 신청은 잘 안합니다. 정 읽고 싶으면 도서관 정기 간행물실에 달려가지...) 그때 보았던 글들이 한권의 책으로 묶여 나왔군요. 

여전한 작가님의 유머 코드에 푸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다, 어느 순간, 찡~해집니다. 여덟살 어린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 셋의 엄마 아빠가 됩니다. 모든 부부의 숙명이 그렇듯, 깍듯이 존대를 하던 어린 아내는 엄마가 되는 순간, 열혈 주부 모드로 변신합니다. 

'아이가 생기자 여덟 살이란 우리의 나이 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빤한 '아빠'와 '엄마'가 되었을 뿐이다. 한 번도 반말을 한 적 없던 아내는 서슴없이 내 이름과 아이 이름을 번갈아 불렀고, 이것저것 심부름 시키는 것을 당연시했다. 그래서 내가 반항했느냐면, 무슨 소리. 고분고분 손에 쥐여주는 쓰레기봉투를 갖다 버리고 기저귀를 사러 한밤중에 마트로 달려 나가는 일을 도맡아 했다. 억울한 것도 없었고 부당하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도 없었다. 그만큼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여자의 모습을 옆에서 찬찬히 바라보고 있자니, 아아, 이건 나이고 뭐고 세상 모든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한 뼘 정도는 더 위대하구나,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시간들이었단 소리다.

나보다 아이들을 우선순위에 두는 아내가 야속해서 며칠 전엔 농담을 가장해 이런 말을 툭 던지고 말았다. 

"당신, 그거 알아? 당신하고 나하고 나이 차랑 남녀 평균 수명까지 더해서 계산해보면 당신은 나 없이 이십 년 가까이 혼자 살아야 해."

그러니까 내 말의 요지는 있을 때 잘해달라는 말이었다.

한데 아내는 그 말을 농담으로만 듣지 않은 모양이었다. 대꾸도 안 하고 한동안 마룻바닥만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가 싶더니, 어느새 눈 주위가 벌겋게 변해버렸다. 어어,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했지만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아내는 더듬더듬 내게 말했다.

"그거 알아.......? 그걸 빤히 알면서도 당신하고 결혼한 거야......."

그날 밤도 나는 또 한 번 경건한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고 방 청소를 했다. 그러면서 나는 생각했다. 이러니, 남자들이란 여자들 앞에서 아이가 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빤히 알면서도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들이 바로 여자들 아닌가, 그게 바로 사랑의 다른 이름 아닌가. 나는 내처 욕실 바닥도 박박 락스로 닦았다.'

(위의 책 35쪽)

 

책을 읽으면서 찡하네요. 저 역시 주먹 불끈 쥡니다. 마님이 제게 늘 하는 말이 있어요.

"삼돌이 주제에 마님을 혼자 남겨두고 먼저 가면 안 되는 거 알지? 내가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야 돼. 먼저 가면 안 돼."

제가 아내보다 다섯 살 많고, 남녀 기대 수명의 차가 7년이니... 마님을 끝까지 모시려면, 저는 평균 수명보다 12년을 더 살아야합니다. 그래서 저는... 술 담배를 하지 않고, 회사까지 자전거로 통근합니다. 어떻게든 오래 살아야하거든요. 두 아이 키우느라 고운 청춘 다 보낸 아내가, 늙어서 남편 병수발하게 할 수는 없다는 각오로, 더욱 건강 관리에 매진해야겠어요.

 

<세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육아로 힘든 엄마 아빠들에게 이보다 더 유쾌하고 따듯한 위로가 또 있을까 싶네요. 강추입니다. 작가님, 다음 책도 조신하게 기다리겠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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