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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걔는 내 친구니까

by 김민식pd 2017. 5. 15.

손원평 장편소설 <아몬드>를 읽었어요. 청소년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소설이에요. 많은 독자들이 쏜살같이 읽어 내려간 재미난 책인데, 저는 은근히 오래 걸렸어요. 아마 왕따로 살았던 저의 고교 시절이 자꾸 떠올라서 그런가 봐요. 주인공은 감정을 느끼지도 못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도 못합니다. 무표정한 아이는 괴물 취급을 받고, 놀림을 당합니다.

어려서 저는 개미가 부러웠어요. 개미는 페로몬으로 소통을 하므로 한 개체의 고통을 다른 개체도 느낀답니다. 어렸을 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과 외로움을 아이들은 왜 느끼지 못할까? 차라리 내가 개미였다면, 나의 아픔이 페로몬으로 상대에게 전달될 수 있다면.’ 나의 외모를 갖고 놀리는 주위 아이들은 내게 상처를 줬지만, 책 속에 나오는 이들은 내게 위로를 줬어요. 허구의 인물이지만, 글을 통해 주인공의 고통과 괴로움을 내 것처럼 느낄 수 있었어요. 어린 시절, 제가 책에 빠져든 이유겠지요.

 

<아몬드>를 보면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와 괴롭히는 아이가 기묘한 우정을 형성합니다. 어느 대목에서 피해 학생이 가해 학생을 이렇게 부릅니다.

그 앤 내 친구니까.”

순간 뒤통수를 땅 맞은 느낌이었어요. 나를 괴롭힌 녀석들을, 나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대학 다니던 어느 여름,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다가 터미널에서 두 녀석을 만났습니다.

“XXX, 방학 때 뭐하냐?” (그들은 집요하게 저의 외모를 비하하는 별명으로 저를 불렀죠.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냥 집에서 뭐...” (그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고교 시절의 찌질한 나로 돌아가요. 말도 제대로 못하는...)

, 집에는 머하러 내려 오노. 대학생이 방학에 토플 공부도 하고, 회화 학원도 다니려면 서울서 있어야지, 니는 영어 공부도 안 하나?”

영어 공부는 집에서 혼자 하는데...” (회화 테이프를 받아쓰기도 하고 문장도 혼자 외우면서 혼자 공부하면 되는데.)

자슥아, 영어를 어예 혼자 공부하노.”

울산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지만, 어른이 되어 울산에 잘 가지 않아요. 최근엔 10년 넘게 가본 적이 없을 정도... 아마 어린 시절 즐거운 추억이 없어서 그런가 봐요.

 

3학년 복학한 어느 날, 대학 신문에 난 광고를 봤어요.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에서 전국 대학생 영어 토론대회를 개최한다고. 두 녀석 중 하나가 경희대를 다녔어요. 순간 피가 끓어올랐어요.

그래, 집에서 혼자 공부한 영어 실력 한번 보여주마.’

 

영어 연설문을 썼다 지우고, 썼다 지우고. 토론 주제에 관련한 문장들을 기사에서 찾아 기를 쓰고 외웠습니다. 이를 악물고 토론 준비를 했어요. 영어 공부가 참 좋은 것이, 반복을 하면 무조건 잘 하게 되거든요. 노력하면 잘 할 수 있는 것을 스물 두 살에 알았어요. 아직 잘 안 되는 건? 시간이 더 필요한 거죠.

저는 취미가 자기계발입니다. 인생에는, 나쁜 친구보다 좋은 적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 공부는 무슨, 그냥 술이나 하자.”라고 나를 편안한 안전지대로 이끄는 친구는 자기계발에 도움이 안 됩니다. 오히려 볼 때마다 내가 저 놈한테 질 수는 없지.’라고 전의를 불태우게 하는 라이벌이 더 유용하지요. 돌이켜보니, 나를 괴롭힌 아이들도, 나를 괴롭힌 상사도, 다 나의 발전을 도와준 고마운 인연들이네요.

 

<아몬드>, 좋은 책이에요. 다 읽은 후, 큰 딸 민지의 책상에 슬그머니 올려두었습니다. 언젠가 민지와 이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아빠의 고교 시절에 대해, 민지의 고교 시절에 대해, 어른이 되어 가는 그 힘든 시간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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