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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과학자가 나라를 걱정합니다

by 김민식pd 2017. 4. 20.

예전에는 한 우물을 파라’ ‘인생에서는 맡은 바, 일만 잘 하면 된다라고 말을 했지만, 앞으로는 일만 잘 해서는 빛을 보기 힘듭니다. 세상도 복잡해지고, 일 잘 하는 사람도 너무 많아졌어요. 변화의 시대에는 한 분야에만 치중하다 기술 발전에 따라잡힙니다. 서울 시내 길 찾기에 능숙한 택시 기사가 있다고 해요. 골목길을 샅샅이 다 아는 것을 택시 운전의 경쟁력으로 삼고 사는데요. GPS 네비게이션의 빅데이터를 이용해 교통 체증을 피해가는 초보 택시 기사에게 밀리는 날이 옵니다. 기술의 발전은 하수와 고수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거든요. , 그럼 네비가 있으니 퇴직 후, 누구나 쉽게 택시 운전을 할 것 같지요?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는 순간, 택시 운전과 대리 기사라는 직업 자체가 사라집니다. 변화의 시대에는, 일 하나만 잘 하는 것보다, 일도 잘하고 취미생활도 잘 하는 게 좋습니다. 일과 취미, 전혀 다른 두 가지 분야의 융합을 통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거든요.

드라마 연출가로서 저는 그리 대단한 PD가 아닙니다. 저에게는 엉뚱한 취미가 하나 있어요. 일이 안 풀릴 때마다 혼자 독학으로 외국어를 공부합니다. 전공과 취미, 이질적인 두 가지를 결합하면 새로운 결과물이 나옵니다. 시트콤 PD가 쓰는 영어 학습서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 피디가 쓰는 연출론 책도 있고, 학원 강사가 쓰는 학습서도 많지만, 시트콤 PD가 쓰는 영어 학습서는 없어요. 변화하는 시대, 다른 두 분야의 조합이 나만의 영역을 개척하는 방법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물리학자가 한 분 있어요. 2013년에 블로그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이종필 박사님. 그 분이 이번에 새 책을 내었습니다.

 

<과학자가 나라를 걱정합니다> (이종필 / 동아시아)

 

 

이 분은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과학 저술가입니다.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이종필의 아주 특별한 상대성 이론 강의> . 그런데 이번에 낸 책은 과학 서적이 아니라 정치 평론집입니다. 평소 매체나 신문에 정치 칼럼을 기고하는데요. ‘물리학자가 무슨 정치칼럼을 써요?’ 하고 물어보면, ‘취미가 시사평론이에요.’라고 답하는 분입니다. 이번에 전공인 과학과 취미인 시사평론, 두가지를 절묘하게 조합한 결과물을 내놓았어요. 그것도 우리에게 과학적 사고가 절실한 절체절명의 순간에 말이지요.

 

과학이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이고 위대한 학문으로 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방법론이다. 구체적인 내용이나 사실들이야 요즘 같은 스마트폰 시대에 간단한 검색으로 다 알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새로운 지식을 창출해낼 수 있느냐이다. 과학자들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방식은 확실히 다르다.’

(프롤로그 중에서)

 

이성과 합리의 정신을 믿는 과학자 이종필은 최순실 게이트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최순실 게이트의 본질은 무당통치가 민주공화국 헌정을 유린한 사건이다. 고관대작들이 머리를 조아렸고, 반발하던 공무원들이 잘려나갔고, 재벌들은 돈을 뜯겼다. 북핵문제, 위안부 협상, 사드 배치 등 국민의 생명과 국가안위와 직결되는 문제가 어떻게 농락당했는지 알 길이 없다. 다른 무엇보다, 대통령이라는 헌법기관 자체가 실질적인 권력 서열 1위인 무당에 의해 무력화되었다. 대통령이 무당에게 결재를 받아온 이 해괴망측한 사건은 문명화된 21세기가 아니라 기원전 21세기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중략)

하야와 탄핵이 각종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를 휩쓸 때, 지금은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사후 혼란을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 역풍은 계산에 넣었느냐는 비난이 쏟아졌다. (중략) 그러나 옳은 길을 갈 때의 역풍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위의 책 82)

 

이종필 박사님은 이 글을 20161028일에 썼어요. 국회에서 역풍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탄핵 소추안 발의를 머뭇거리던 시점이지요. 그때 국회의원들을 향해 한방 날립니다. ‘역풍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

 

조기대선을 앞두고 4차 산업혁명이 어떠네, 사물 인터넷이 어떠네, 인공지능이 어떠네, 다들 떠들지만, 정작 과정과 방법론상의 함의까지 내다보지는 못하고 있어요. 대선 후보들이, 아니 적어도 그 캠프에 계신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지난 10, 무엇이 문제였는지, 문명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과학자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으면 좋겠어요. 유권자인 우리도 이 책을 읽고 한 장의 투표권을 행사했으면 좋겠어요. 새로운 세상을 희망한다면, 지난 10년부터 돌아볼 필요가 있거든요.

 

물리학자 이종필의 잃어버린 10

문명은 야만의 종식에서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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