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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사표를 쓰기 전에 해야 할 일

by 김민식pd 2017. 3. 2.

페이스북 친구들 중에 책을 좋아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분들의 타임라인을 살펴보다 2번 이상 언급되는 책이 있으면 한번 찾아봅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다른 경로로 두번 추천받았다는 것도 나름의 인연이거든요.

 

퇴사하겠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 김미형 / 엘리)

 

아주 유쾌하게 읽었습니다. 일본 명문대를 나와 아사히 신문에서 기자로 평생을 일하던 저자가 어느날 '아프로 헤어'를 한 후, 인생이 조금씩 꼬여가는(?) 이야기입니다. 항상 정답만을 추구하며 살다, 어느날 뒤집어쓴 아프로 헤어 가발에 주위 사람들이 즐거워합니다. '어라 이런 게 웃기나? 그럼 아예 이 참에 헤어스타일을 바꿔봐?' 아프로 헤어를 한 후, 거리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들이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저랑 친구해 주실래요?" 엉뚱한 장난 끝에 발견한 삶의 재미!


'어쩌면 행복이란, 노력 끝에 찾아오는 게 아니라 의외로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게 아닐까요?'

(10쪽)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엉뚱한 생각과 행동을 이어가다, 나이 50에 안정된 정규직 일자리, 기자직을 걷어차고 나옵니다. 아, 멋지네요, 이런 삶.

저는 2년 전, 비제작 부서로 좌천했어요. 평생 PD로 살 줄 알았는데... '전국의 시청자들이 내가 만든 드라마를 본다!' 는 재미로 살았는데, 더이상 피디가 아니라니, 이제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하나... 그냥 지금 이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자... 그래서 매일매일 블로그에 글을 열심히 올렸는데... 어라? 이게 또 은근히 재미있는 겁니다. 연출이라는 직함에 목을 매면 회사가 하는 모든 인사 행위가 징계가 되어버리지만, 전업작가의 꿈을 꾸는 블로거로 산다면, 이 시간은 오히려 자기계발을 위한 배려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인생은 결국 내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이니까요.)  

책의 저자, 에미코 아줌마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본사에서 근무하다 어느날 섬으로 유배를 갑니다. 싱글 엘리트 직장 여성으로 도시에서 살던 그가 어느날 시골로 좌천되는데요. 신문사의 경우, 지방 총국에도 데스크가 필요한데, 가족이 딸린 유부남 중년 기자보다 혼자 사는 노처녀 기자가 만만했겠지요. 자세한 사연은 나오지 않지만 책을 읽다보면 비혼 여성으로 사는 어려움이 만만찮게 느껴집니다. 그는 그렇게 타의에 의해 내려간 시골 생활에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나섭니다.

'당시의 나는 '즐거움을 찾는다'는 것에 무척 진지했습니다. 그건 아마도 나를 '유배 보낸' 인간들에게 '날 물 먹였다고 생각하지? 천만의 말씀! 난 요렇게나 재밌고 즐겁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답니다~'하고 말해주고 싶은 쪼잔한 심경 때문이었습니다.' 

(49쪽)


 
아, 팍팍 찔립니다. 나만 쪼잔한 게 아니군요.^^ 언젠가부터 미친듯이 책을 읽고 여행을 다니고 있어요. '먹고 살기도 바쁜데 이렇게 팔자 좋게 살아도 되나?' 나름 필사적으로 노력중입니다. PD라는 직함이 없어도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어요.

 

20년 넘게 MBC에서 일하면서 선배님들이 정년 퇴직 후 힘들어하시는 모습을 많이 보았습니다. 녹화장에서 출연자들을 호령하며 살던 감독님들이 어느날 정년퇴직을 하자 힘들어하시더군요. 나이 50, 아직 새로운 인생을 준비할 수 있는 시기에, 퇴직 이후를 준비할 기회를 갖게 되어 무척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작 현장에서 연출로 살다 은퇴해도 좋겠지만, 지금처럼 내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것 역시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도 언젠가는 퇴직을 할 거니까요.  

 

퇴사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책에서 읽은 가장 귀한 충고는,  씀씀이를 줄이고 저축을 늘리라는 것입니다. 월급의 노예로 사는 한, 회사에서 어떤 부당한 처우를 해도 입을 닫고 견디며 살 수 밖에 없어요. 전 이걸 첫 직장에서 사표를 던지던 스물 다섯에 깨달았습니다.

92년에 첫 직장에 들어간 후, 첫 달부터 매달 꼬박꼬박 월급의 반은 저축을 했습니다. 그때 읽은 재테크 책에서 배웠거든요. '월급 다음날 저축을 먼저 하고, 남은 돈으로 한 달을 살아라. 절대 신용카드는 쓰지 말고, 할부로 물건 사지 말고.' 그렇게 모은 돈이, 회사를 그만두고 나올 때 든든한 뒷배가 되었어요. 빚이 있으면 세상의 노예가 되고, 저축이 있으면 자유인으로 살 수 있어요. '공짜로 즐기는 세상!' 돈 없이도 즐겁게 살 수 있다고 믿어야, '퇴사하겠습니다!'하고 외칠 수 있어요. (제 인생 가장 통쾌한 순간 중 하나가 첫 직장에서 사표를 던질 때였어요. ^^) 

 


'퇴사하겠습니다' 
퇴사를 꿈꾸는 분들보다 오히려 '회사 인간'으로 사는데 너무 익숙한 분들이 읽으면 좋겠어요. 평생 정답만 쫓다가는 회사 인간으로 살게 됩니다. 퇴직 이후 우리는 정답이 없는 세상을 만나요. 어쩌면 노후란, 가족 부양의 책임에서 벗어난 가장이, 아이 양육의 부담을 벗은 주부가 자신만의 오답을 찾아가는 시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책을 통해, 그날 이후를 미리 살펴보는 기회를 가지시길.

 

책이 참 좋은게요, 내가 직접 하기엔 힘들 일도, 다른 이의 경험을 통해 대리체험을 할 수 있거든요. 저자가 힘들게 얻은 깨달음은 덤으로 따라오고요. 재미와 의미,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건 그래도 독서가 최고 아닌가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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