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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가슴 설렐 땐, Say Yes!

by 김민식pd 2017. 2. 17.

94년 가을, 첫 직장을 그만두고 대학 도서관에 다니며 통역대학원 입시를 준비할 때 일입니다. 도서관 앞 게시판에 호주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PSAT 경시대회 공고가 붙어있었어요. 당시는 토플과 토익이 유명하지 PSAT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어요.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시험이었지만 끌렸어요. 경시대회 1등 상품이 호주 왕복 항공권에 3주간 체제비 지원이었거든요. 

11월에 통역대학원 입시 시험(당시는 외대 통역대학원 한 곳 뿐이었어요.)을 봐서 떨어지면 해외로 떠야지 하고 있었어요. 그렇잖아요. 대학원 진학하겠다고 회사까지 때려치우고 나왔는데 입시에 떨어지면 창피하니까 얼른 국외 도피를 해야겠다... 그런데 12월은 겨울이라 유럽이나 미국은 추울테고 남반구로 가야지 했는데 어라? 호주 여행이 상품?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더군요. 바로 달려가서 신청하고 시험을 봤습니다. 그 시험에서 만점이 나왔어요. (아, 또 자랑질...^^)

저는 PSAT이라는 시험을 들어본 적도 없어요. 다만 어학 능력 검정 시험이라면, 따로 고득점 비결이 있는 게 아니라 언어 자체를 공부하면 될 것이란 믿음이 있었어요. 만점자가 2명이 나왔기에 호주대사관에 가서 영어 인터뷰까지 봤어요. 영어 면접 결과, 대사관 직원분이 저를 뽑아주셨어요. 다른 만점자는 유학생이었기에 국내 독학파인 제게 가산점을 주셨다고. 어쩜 그렇게 유창하게 회화를 잘 하냐고... (그냥 책에서 외운 문장을 줄줄이 읊은 것 뿐인데... ^^)

다행히 그해 통대 입시에도 합격하여,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치과를 돌아다니며 영업을 뛰던 제가, 통역대학원에 합격하고 호주 정부에서 항공권을 제공받아 여행까지 떠나게 되었어요. 영어가 제게 준 선물은 정말 무궁무진하네요.

 

'35억 년 전 세상 그대로' (문경수 지음 / 마음산책)라는 책을 읽고 문득 20년 전 호주 배낭여행이 떠올랐어요. 저는 호주 동부 해안을 따라 일주 여행을 했습니다. 시드니 - 바이런베이 - 골드코스트 - 브리즈번 - 케언즈 - 울룰루 - 멜버른. 호주 배낭여행을 가면, 대부분 동해안 일주를 생각합니다. 서호주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들었거든요. 책을 보니, 서호주에는 화성 탐사를 준비하는 우주인들의 훈련캠프가 있답니다. 문명의 흔적이 없는 황량한 황무지라 분위기가 딱 화성이라고... ^^ 책제목 그대로 35억 년 전 세상 모습 그대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서호주군요.

 

작가인 문경수 님은 '과학 탐험가'신데요. 공대를 나와 과학기자로 일하던 저자가 '과학 탐험가'가 된 과정이 재미있습니다. 호주 퍼스에서 여행사를 도와 일하다, 쉬는 날에는 주립 도서관과 박물관에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냅니다. 지질에 관심이 있던 작가는 <오스트레일리안지오그래픽>이라는 잡지 25년치를 발견합니다. 그날부터 하루에 1년 분량인 여섯 권씩 탐독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박물관 서점의 신간 코너에서 이름이 낯익은 저자의 책을 발견합니다. 잡지에 자주 등장했던 호주인 지질학자의 새 책을 읽고, 저자 인터뷰를 신청합니다. 그에게는 가슴 설레는 만남이었겠지요. 상기된 그의 표정에서 과학을 사랑하는 순수한 열정을 느낀 호주의 과학자는 생면부지의 아시아인에게 문득 이런 말을 합니다.

 

"퍼스에서 열리는 국제 시생대 심포지엄을 마치고 9월 5일부터 학회에 참석한 과학자들과 함께 탐사를 갈 예정입니다. 아마 각 대륙을 대표하는 우주생물학자가 함께하는 최초의 우주생물학 탐사가 될 겁니다. 같이 가지 않을래요?"

(43쪽) 

저자는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예!"를 외칩니다. 그것이 문경수씨가 떠난 첫번째 과학 탐사였어요. 이 책은 NASA 우주 생물학자들과 함께 떠난 서호주 탐사 이야기입니다. 과학을 주제로 한 탐험에 매료돼 서호주, 몽골 고비사막, 하와이 빅아일랜드, 알래스카 같은 지질학적 명소를 탐험하며 사는 저자, 꿈을 이루는 과정이 정말 멋있지요?

저는 도서관이 꿈을 이루는 공간이라 생각합니다. 작년 한 해, 도서관에서 오전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책을 읽으며 살았어요. 그 결과가 올 초에 나온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고요. 인생의 전환기에는 도서관에서 꿈을 키웁니다. 94년, 회사를 그만두고 통역사의 꿈을 꾸던 공간도 한양대 중앙도서관이었어요. (당시엔 졸업생도 이용 가능했거든요.) 그곳 게시판에서 호주 여행의 기회를 잡았고요.

인생에서 가슴 설레게 하는 기회를 만난다면 무조건 'Say Yes!' 할 일입니다.

"영어 경시 대회 참가하시겠습니까?" "예!"

"우주생물학 탐사에 동참하시겠습니까?" "예!"

"영어 학습 비결을 주제로 책을 쓰시겠습니까?" "예!"

 

앞뒤 따져보고 될까 말까 고민할 이유가 없어요. 제 나이 이제 50인데요. 살아보니 인생에서 가슴 뛰는 일을 만날 기회가 그리 많지 않더군요. 가슴 뛰게하는 이성을 만나면 일단 들이대야 하고요. 가슴 뛰는 기회가 왔을 때는 무조건 Yes!라고 하셔야 합니다. 

Say yes!

그것이 인생이 즐거워지는 마법의 주문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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