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짠돌이 독서 일기

책읽기의 쓸모

by 김민식pd 2016. 8. 2.

2016-176 책읽기의 쓸모 (김영란 / 창비)

 

요즘 가장 핫한 이슈 중 하나가 '김영란 법'입니다. '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법'. 이런 법, 정말 반갑네요.

 

고등학교 동문 주소록에 올라온 제 전화번호를 보고 누군가 연락한 적이 있어요.

"야, 김민식이! 오랜만이다! 잘 지내지?"

정말 미안하게도, 저는 그 친구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어요. 그는 얼마 전 식당을 차렸다고 했어요. 그러고는 '요즘 먹고 살기 힘들다. 방송에 나와야 식당이 뜬다더라. 너네 회사에서 하는 맛집 탐방 프로그램에 나오게 도와다오.'라고 하더군요. 정말 난감했어요. 저는 그런 부탁을 잘 못합니다. 성격 탓인가봐요.

저는 술 담배 커피를 하지 않습니다. 술을 마시면, 술자리에 가야하고, 술자리에 가다보면 청탁이 이어집니다. 좋아하던 골프를 딱 끊은 것도, 접대로 이어지는 골프 모임이 불편했기 때문입니다. 청탁과 접대가 불편한 저로서는, 김영란 법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인정에 휘둘리는 마음 약한 사람들에게 이런 법은 참 고맙지요. 

늘 궁금했어요. 세상을 바꾸는 이런 멋진 법을 만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러다 김영란 선생님의 책을 만났어요. '책읽기의 쓸모'. 아, 이 분, 책을 정말 많이 읽으시네요. 그 분의 삶에 책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제인 에어'에 대해 영국의 에세이스트 체스터턴이 쓴 책 속의 글을 옮겨봅니다.

 

'밖으로 나가서 도시를 한번 보시오. (...) 보다시피 지금 당신은 19세기 말의 집들을 보고 있지만, 이 모든 집들은 마치 다 똑같이 생겼소. 그리고 저 모든 사람들은 일을 하러 가고 있고 그들 또한 다 똑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오. 하지만 브론테가 당신에게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들이 결코 똑같지 않다는 것이오. (중략)

판결이라고 하면 흔히 보편적 정의, 보편적 기준을 대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똑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이라 해도 모두 각자의 개별적인 사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지요. (중략) 재판관은 그런 개별성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 책을 읽고 저는 그동안 제가 소설을 많이 읽어온 것이 전혀 쓸모없는 일만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변에서 왜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느냐, 시간이 아깝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거든요. (중략)

내가 읽어온 책들이 내게 '공감'이라는 훈련을 시켜주어서 내가 현실에서 사건을 보고 판결을 하는 자세에 영향을 주었다고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직업적으로도 꽤나 쓸모가 있었던 셈입니다.'

 

(위의 책 79~80쪽) 

 

우리나라 사법사상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자,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배려하여 '소수자의 대법관'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김영란 선생님, 아, 이렇게 멋진 분도 있군요.

저의 경우, 드라마 연출이라는 직업 덕에 책을 더 많이 읽게 되었어요. 책을 통해 만나는 다양한 인물들의 개별적 사정을 이해하고, 그들의 사정에 공감할 수 있어야, 드라마 속 다양한 인물들에 감정이입하기가 쉬워지거든요.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상상하는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앞에 있는 다른 사람의 감정을 상상할 수 있는 힘입니다. 앞으로 '휴먼 스킬'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사람과 함께 일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역지사지의 훈련입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보기, 그것을 가장 쉽게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독서지요.

 

김영란 선생이 소개한,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정의'라는 책에서 한 대목.

'누스바움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정확하게 상상하여 사려깊게 측정하고, 나아가 그것에 관여하고 또 그것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의 실상이 무엇인지 알고 또 그것을 바꾸어나가는 힘을 얻는 강력한 방법"이라고 하면서 이와 같은 상상력이 없다면 재판관의 평가는 핵심을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의 책 82쪽)

('공부의 시대'라고 창비에서 펴낸 강연 시리즈 중 한 권입니다. 우리 시대 다섯 분의 선생님을 모시고 강연을 청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상상력이 있어야,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고,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 세상을 바꾸는 힘이 생깁니다. 상상력은 그렇기에 변화의 원동력이 됩니다.

 책읽기의 쓸모, 바로 그 상상력을 키워주는 데 있는 게 아닐까요?

반응형

'짠돌이 독서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금 대학에서는 무슨 일이?  (1) 2016.08.09
일곱 편의 소설 이야기  (2) 2016.08.03
혼자라도 괜찮아  (4) 2016.08.01
그들이 차별에 찬성하는 이유  (2) 2016.07.30
시간과 오리지널리티  (0) 2016.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