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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짜 PD 스쿨/날라리 영화 감상문

영화 '부산행'이 반가운 이유

by 김민식pd 2016. 7. 27.

(스포일러가 거의 없는 '부산행' 리뷰입니다. 천만 관객을 넘기면 (제가 보기엔 거의 확실!) 이 영화의 의미에 대해 한번 더 쓸게요. 오늘은 거의 청정 리뷰에요. ^^)

 

예전에 '느낌표'의 '찰칵찰칵'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연출한 적이 있습니다. 카메라에 포착된 미담의 주인공을 만나 칭찬하고 황금메달을 전달하는 코너였어요. 하루는 부산에서 제보가 와서 MC 이경규 씨에게 물었어요.

"당일 출장으로 부산 한번 가시는 거 어때요?"

"뭐 타고?"

"KTX요."

기겁을 하시더군요.

"난 부산행 KTX는 절대 안 타!"

예전에 촬영을 마치고 KTX를 탔는데, 지나가는 중학생 하나가 "어, 이경규다!" 하더랍니다. 와서 사진 찍자고, 사인 해달라고. 해주고 보냈는데, 갑자기 애들이 수십명이 들이닥치는 거예요. 알고보니 앞 칸에 수학여행가는 중학생 단체가...  "아저씨, 싸인이요!" "저랑은 악수해주세요!" "사진 찍어요!" "복수혈전처럼 '아비요!', 한번 해주세요!"

경규 형 얘기, "야, 하필 그 열차가 무정차 부산행 KTX라 중간에 도망갈 수도 없더라고!"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 영화를 보면서 경규형 얘기가 생각나 혼자 실실 웃었어요. 떼거지로 몰려드는 좀비의 모습 위로, 중학생 남자 아이들의 아우성이 겹쳐지는 듯해서... ^^

 

연상호 감독의 독립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을 극장에서 보고 '2011년 최고의 영화'라고 엄지를 척 세운 적이 있습니다.

2011/11/07 - [공짜로 즐기는 세상] - 왕따가 세상에 맞서는 법

 

 

신인 감독이 실사 장편 영화로 데뷔하려면, 먼저 제작사의 예산을 따내야하고, 얼굴이 알려진 배우를 잡아야합니다. 그런데 연상호 감독은 독립 애니메이션이라는 선택을 통해 두 가지 난관을 쓰윽 그냥 통과하더군요. 성인을 위한 독립 애니메이션이라니, 정말... 와우... 

'부산행' 영화를 보면서 저는 3번 정도, '음, 이제 엔딩이구먼...'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열차는 멈추지 않고 그 지점을 그냥 쓰윽 통과해버리더군요. 세 번 모두, 블랙 페이드아웃하고 자막을 흘려도 무난한 지점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때 느꼈어요. '감독이 제대로 보여주려고 작정했구나.'

'동대구역 장면은 원래 극본 상에는 없었다. 영화를 찍다가 즉흥적으로 떠올린 장면이다.' 라는 연상호 감독의 인터뷰를 읽고 무릎을 쳤어요. "역시 그랬구나!" 현장에서 떠올린 콘티로 그렇게 엄청난 장면(아, 진짜... 스포일러 없이 글을 쓰자니, 묘사를 못하겠네요... 이해해주세요. ^^)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게 참...

 

며칠 전 CNN 뉴스를 보던 아내가 저를 불렀어요. "어머 저 사람이 아직도 방송을 하네?" 봤더니 90년대 60Minutes을 하던 기자가 화면에 나오더라고요. CNN을 보면 2,30년씩 된 사람들이 아직도 나와요. 그들이 방송 뉴스의 포맷을 만든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나이 60이 넘도록 계속 하시면...

최근 몇 년 한국 영화계를 보면서 했던 생각. 90년대 한국 영화의 부흥기를 이끄는 감독들이 너무 오래 가는 게 아닌가. 유명 감독들의 반복되는 자기 복제, 이야기는 새롭지 않은데 자극만 더 강해지고, 부족한 내러티브를 물량공세로 채우고... 영화팬으로서 아쉬웠어요.

 

젊은 세대가 보기에 세상은 '부산행' KTX 열차입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달려갑니다.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르겠어요. 곧 멈출 것 같은데 일단은 계속 달립니다. 운좋게 먼저 탄 사람들이 자리를 독차지하고 있어요. 브렉시트를 보는 영국의 젊은이들이, 트럼프의 질주를 보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느끼는 공포도 비슷하겠지요. 마치 좀비처럼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더 정확하게는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날로 늘어나는 이 곳, 여기가 바로 '부산행' 열차가 아닌가...

 

실사 장편 대작 영화는 그동안 유명감독들만의, 그들만의 리그였어요. 그 견고한 장벽을 '좀비가 가득한 KTX 열차'로 뚫고 나가는 연상호 감독. 아, 멋지네요. 역시, 유명 감독의 태작을 보는 것보다, 신인 감독의 괴작을 보는 편이 훨씬 더 즐겁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아,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스스로 엔딩이라 생각하는 장면이 몇 개 나와요. 그때 그냥 무심한 척, 그 눈앞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그냥 통과해버리는... 그런 삶을 응원합니다.

 

2011/11/07 - [공짜로 즐기는 세상] - 왕따가 세상에 맞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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