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짠돌이 독서 일기

화가의 마지막 그림

by 김민식pd 2016. 6. 24.

2016-133 화가의 마지막 그림 (이유리 / 서해문집)

 

제가 좋아하는 선배가 한 분 있어요. MBC 해직기자이신데, 지금은 스피커를 만들고 계시는 박성제 선배님. 예전에 블로그에서 소개한 적도 있지만, 그 선배님은 글을 참 잘 쓰십니다. 고수의 글을 눈동냥하려고 그 분 페이스북에도 종종 놀러가는데요. 얼마전 그 선배님이 페이스북에 그림을 한 장 올렸어요.

(곡성에 나오는 외지인을 모델로 그리신 듯)

 

스피커를 만들다 이젠 화가로 전업하시려나? 했는데, 그 그림의 사연이 올라왔어요.

 

'<화가의 마지막 그림>(이유리 / 서해문집)을 읽고...

어제 저녁에 30년 만에
갑자기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던 건
바로 이 책 때문입니다.

몰입감이 상당하더군요.
소설도 아닌데 하루 만에 다 읽어 버렸습니다.

미술가와 그 작품을 소개하는 책들은 많이 있지만
이 책은 접근방식과 구성이 참 새로운 듯 해요.

화가 19명의 마지막 작품을 소개하고 
그 유작이 탄생하게 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간결하면서도 운치있는 필력으로 풀어나갑니다.

무엇보다 매 장의 이야기가 단편 추리소설을 읽는 듯
기승전결 구성이 치밀해서 참 좋았구요,

가끔씩 튀어나오는 반전도
저처럼 미술 문외한에게는 아주 신선했습니다.

- 이중섭이 죽기 직전 그린 그림에 나온
얼굴없는 여인은 과연 누굴까?   

- 반 고호의 숨겨진 진짜 유작은?
그리고 그는 정말 자살한 것일까?

- 미소년을 사랑했던 미켈란젤로,
그리고 그의 죄의식이 남긴 마지막 조각상의 의미...


독자의 마음을 쥐었다 놨다 하는 필력이 대단합니다.
미술을 좋아하시는 분들과
저처럼 미술 문외한이지만 약간의 관심은 있는 분들이라면
진짜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박성제 기자의 페이스북에서)

글을 읽으니 확 당기더군요. 그래서 저도 바로 교보문고에 달려가서 샀어요. 와우, 정말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책을 읽고 나니 성제 형이 왜 30년만에 그림을 그리셨는지 이해할 것 같았어요.

화가가 죽기 전에 남긴 그림 한 장 한 장을 들여다보면,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그 누구도 '이 그림이 내 평생에 마지막이야,' 라고 생각하고 그린 사람은 없어요. 언제 떠날지 우리는 아무도 모르잖아요. 늙고 병들어 지쳐가는 와중에도 화가는 붓을 놓지 않아요. 그림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아, 살고싶다. 더 살아서 그림을 더 그리고 싶다!' 책을 덮고 나니 '나도 그들처럼 치열하게 살고 싶다!' 하는 생각이 치솟습니다. 책을 읽고 나면 뭐라도 하고 싶어져요, 막. 아마 그래서 박성제 선배는 그림을 그렸겠지요.

이 책을 통해 처음 접한 화가도 많아요. 그중 펠릭스 누스바움이라고, 나치 시절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좁은 다락방에 숨어살던 유대인 화가가 있습니다. 다락방에서도 그림을 그렸는데, 공간이 너무 협소해 한발 뒤로 물러나 자신이 그리는 그림의 전체 구도를 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대요. 그림을 제대로 그리고 싶어서 스튜디오를 얻어 매일 저녁 은신처를 나와 스튜디오로 향합니다.  은신처에서 다락방을 오가는 15분 정도의 짧은 거리가 그에게는 숨 막히는 공포의 길이었답니다. 당시 유대인은 오후 8시부터 오전 7시까지 통행금지였고, 이를 어겼다가는 즉시 체포, 이송되었거든요. '유대인 증명서를 쥔 자화상'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살던 시절, 그의 불안이 잘 드러납니다.

'유대인 증명서를 쥔 자화상' 펠릭스 누스바움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왜 굳이 그림을 그렸을까. 나치의 눈을 잘 피하려면 차라리 그림 따위 그리지 않는 게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그 엄혹한 시대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힘을 얻었다. 은둔자였던 그에게 그림은 스스로 살아있다는 증거이자 저항의 행위였던 것이다.'

(위의 책 152쪽) 

 

언젠가 유럽 여행을 간다면 이 책을 꼭 챙겨가고 싶어요. 외딴 독일 마을에 있다는 펠릭스 누스바움의 갤러리를 찾아가 화가가 목숨을 걸고 남긴 그림을 보고 싶어요. 그림의 문외한인 제게 문득 미술관 순례의 꿈을 심어준 책, 이 책에는 그런 묘한 힘이 있어요.

 

알파고의 시대, 무엇을 하고 살 것인가? 우리 모두 예술가가 되어야한다고 믿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여가로 누릴 수 있는 시대가 옵니다. 수동적 여가보다는 능동적 여가를 즐기며, 내 삶의 적극적인 표현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사는 시대. 우리보다 더 더 척박한 환경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운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서, 삶에 대한 투지를 더욱 가다듬고 싶어요.

 

'19인의 예술가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생의 끄트머리에 이르러 이 보석 같은 작품을 탄생시킬 수가 있었을까? 활시위가 고통스럽게 휘어질수록 화살은 더 멀리 날아간다고 했던가. 역시나 예술가들이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래서 '묘비명'과도 같았던 예술가들의 마지막 작품을 살피는 것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의 영구 생존율은 0%'라는 이 자명한 사실 앞에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하는지, 화가의 마지막 그림만큼 잘 알려주는 것이 또 있을까?'

(작가의 여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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